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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량동 율량동고가(栗陽洞 栗陽洞古家)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율량동 율량동고가(栗陽洞 栗陽洞古家)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7. 4. 14:57


이 건물은 율량동고가라 칭하며 율봉공원내에 이건설치 하였다.

이곳은 조선조시대 율봉역이 있었던 곳으로 율봉역 찰방을 지낸 인물들의 송덕비도 4기 자리하고 있다.




이 건물은 청주 읍성 안에 있었던 충청병마절도사영의 관아로 사용했던 건물로 추정된다.

충청도병영은 원래 충남 서산 해미현에 있었다가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청주의 군사적 중요성이 강조되자 1651년(효종2)에 청주로 옮겼다.

조선 후기에 그려진 청주읍성도에는 충청병영 관청건물은 운주헌을 비롯하여 통군루.내아 등 여러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충청도병마절도사영문만 남아있다.이 건물의 건립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충청도병영 설치시기와 같은 시기로 추정된다.1923년에 율량동 300번지로 이건되어 민가로 사용하면서 많은 부분이 변형되었다.율량동 일대가 택지지구로 개발되면서 2014년 지금의 위치(율량동율봉공원내)로 옮겨 복원하였다.

규모는 정면4칸 측면2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단층구조로 가운데 칸에 대청마루을 두고 좌우에 각각 온돌방을 두었다.

대들보는 견실하고 전면에 팔각초석과 원기둥을 사용하였다. 이 건물은 조선후기 청주지역병영시설의 건축적 특징과 기법을 살펴볼수 있는 건축사적 의미가 있는 유구이다.

 



허직,김중희.이익선,김하련등 율봉역 찰방을 지낸 인물들의 송덕비가 4기 자리하고 있다.


율량도찰방은 충청북도 청주에서 조선시대의 교통·통신기관인 역참(驛站)을 관장하던 관리를 칭한다.

역참은 국가의 명령과 공문서의 전달 변경의 중요한 군사정보, 그리고 사신왕래에 따른 영송과 접대를 위하여 마련된 교통·통신기관의 하나로 우역(郵驛)이라고도 한다. 역참은 군사·외교 외에 중앙집권을 유지하기위한 행정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역참의 운영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역로의 조직과 역원 및 역마의 확보였다. 조선시대 충청도에는 6개의 역참도가 있었으며 율봉도(栗峰道)가 그 중 하나이다.
율봉도 찰방(察訪)은 문관 종6품의 외관직으로 마관(馬官), 우관(郵官)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며 30개월마다 교체하였다. 청주 역원 중 하나였던 율봉역에는 1명의 찰방이 있어 본도의 율봉(栗峰), 저산(猪山), 진천현(鎭川縣)의 장양(長陽), 태랑(太郞), 청안현(淸安縣)의 시화(時化), 문의현(文義縣)의 덕유(德留), 옥천현(沃川縣)의 증약(增若), 가화(嘉和), 토파(土坡), 순양(順陽), 화인(化仁), 영동현(永同縣)의 회동(會同), 황간현(黃澗縣)의 신흥(新興), 보은현(報恩縣)의 원암(原岩), 함림(含林), 회덕현(懷德縣)의 전민(田民) 등 17개 역을 찰방하였다.

『청주읍지(淸州邑誌)』 「율봉조」에는 율봉역의 찰방을 지낸 19명의 인물이 기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명익(李明翼), 김득용(金得龍), 민해(閔海), 이향윤(李享胤), 최문호(崔文浩), 김군석(金君錫), 여이량(呂爾亮), 한진하(韓振夏), 원식(元植)[비석을 세웠다], 김중희(金重熙)[비석을 세웠다], 정왕(鄭王)[비석을 세웠다], 이사관(李思觀)[비석을 세웠다], 심달한(沈達漢)[비석을 세웠다], 강장환(姜長煥)[비석을 세웠다), 이기주(李箕周)[비석을 세웠다], 김대신(金大呻)[비석을 세웠다], 윤철술(尹哲術)[비석을 세웠다], 기문현(奇文鉉)[비석을 세웠다], 강하규(姜夏奎)[비석을 세웠다] 등이다.




율량동을 택지개발하면서 나온 건물의 주초석등을 한곳에 모아 놓았다. 주초석의 크기나 갯수등으로 보아 큰건물이 자리했음을 짐작할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