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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화성리 연사종묘지(道安面 花城里 延嗣宗墓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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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화성리 연사종묘지(道安面 花城里 延嗣宗墓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7. 13. 06:18


명암마을 뒷산 주실산에는 곡산연문의 시조격이 되는 연사종을 비롯한 연음,연지등의 묘지가 자리하고 있으며 홍살문을 세우고 홍살문 앞으로는 제법 넒은 자리가 있어 후손들의 모임이 만만치 않음을 알수있다.



연사종묘표(延嗣宗墓表)와 신도비(神道碑) 입니다 정후공 연사종의 묘소는 본래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 평원일대의 곡산연씨 묘역에 있었다. 1990년 9월 17일에 도안면 화성리 ‘명암’ 뒤쪽에 있는 주실산의 곡산연씨 묘역으로 이장하여, 매년 음력 10월 1일에 시제를 지내고 있다. 묘비 또한 묘소를 이장하면서 함께 옮겨와, 묘소 앞에 세웠다. 비문은 영조 30년(1754)에 외손 민우수(閔愚洙)가 지었고, 글씨는 송명흠(宋明欽)이 썼다. 신도비는 묘역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세워져 있는데, 황희(黃喜)가 찬(撰)한 1440년의 비문을 1959년에 후손인 연종혁(延鍾赫),연명일(延明一),연규영(延圭瑛)의 노력으로 다시 세웠다. ,연음묘표(延陰墓表)와 신도비(神道碑) : 회양부사(淮陽府使) 연음(延陰: 1418~1452)의 묘소는 연사종의 묘소 바로 아래 그의 둘째 형인 연비(延庇)의 묘소 옆에 있다. 이 또한 서울시 노원구 하계동에서 1973년에 이장한 것이고, 그의 형 묘소는 1990년에 이장한 것이다. 연음의 묘표는 정조 3년(1779)에 10대손 연동헌(延東憲)이 쓴 것이다. 또한 1973년에 새로 신도비를 세웠는데, 비문은 후손인 연규복(延圭復)이 짓고 썼다



곡산연문 묘소에서 바라본 화성리 마을의 전경이다.

충주에서 청주로 향하는 국도가 뻗어있고 석곡리의 넒은 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연사종(1366~1434)은 상장군 연단서(延丹瑞)의 후손으로, 곡산연씨(谷山延氏)의 실질적인 시조(始祖)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자(字)는 불비(不非)이고, 함흥 출신이다. 연사종은 조선 초기 태조대(太祖代)에서 세종대(世宗代)까지 4대조의 공신을 역임한 큰 인물이었다. 고려 우왕 14년(1388)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요동정벌에 참여한 공로로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봉되었으며, 태조 2년(1399)에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태종 1년(1401) 제2차 왕자의 난 때에 정안군파에 가담하였고, 정안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등극하는 과정에서 공로가 많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태종 10년(1410) 동북면병마절도사(東北面兵馬節度使)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했으며, 이 해에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擦理使)가 되어 경원부와 경성에 입성,수복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간룡성 싸움에서 패배하여 탄핵을 받고 함주(咸州)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1411년 12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퇴임하였고, 이듬해에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어 함주군 일대에 있는 4조왕과 비의 능(陵)을 조성하고 정비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1413년에 영흥부윤을 겸직했으며, 위의 공로로 인해 곡산군(谷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노모의 병환을 간호하기 위해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가받지 못하다가 왕으로 시연(侍宴)을 받고 휴가를 받았다. 그는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흙 베개를 베고 초막에서 시묘살이를 하여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모친상을 마치고 태종 16년(1416)에 다시 등용되어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었고, 태종 18년(1418)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 오면서 의서와 약재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세종 1년(1419)에 훈신에 대한 예우로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에 오르고, 세종 4년(1422)에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세종 8년(1426)에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하였다. 연사종의 묘소는 서울시 성북구 하계동에 있었으나, 개발로 인하여 지금은 화성리 ‘명암’의 주실산 묘역에 모셔져 있다. 또한 경기도 양주서원에 있던 정려도 ‘명암’으로 이전하여 보호하고 있다.



연사종의 정려는 화성리 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청연사종의 정려와 같이 있는 청송심씨는 정조 16년(1796)에 남편이 죽자 따라 죽을 것을 결심하고 남편의 시신 염습을 마친 후 6일 후에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단청을 새로하여 산뜻하니 참 좋았다 흠이라면 효열문이 자리한곳이 자리가 조금 좁은듯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