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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화성리 효열문(道安面 花城里 孝烈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도안면 화성리 효열문(道安面 花城里 孝烈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7. 3. 07:34

 

곡산연문효열각(谷山延門孝烈閣)는  화성5리 ‘북촌’에 있다. 이곳은 본래 정조 20년(1796)에 나라에서 세운 연사종의 6대손인 부호군(副護軍) 연진행(延震行)의 처 순흥안씨(順興安氏)의 열녀각이었는데, 1910년에 경기도 양주군에 있던 효자 정후공(靖厚公) 연사종(延嗣宗)의 정려를 옮겨와 합설하였다. 그리고 1916년에는 연사종의 13대손인 연재관(延載寬)의 처 청송심씨(靑松沈氏)의 정려를 함께 복설하였다.

그러다가 순흥안씨의 정려는 1984년에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로 옮겨 세워, 현재는 효자 연사종과 효부 청송심씨의 효열만을 기리고 있다. .

 

 

 

 

현재의 건물은 정면 2칸,측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편액에는 ‘효열문(孝烈門)’이라고 되어 있으며, 그 안의 앞쪽에는 ‘효자추충익대좌명공신대광보국숭록대부의정부찬성곡산부원군증영의정시정후공연사종지려(孝子推忠翊戴佐命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贊成谷山府院君贈領議政諡靖厚公延嗣宗之閭)’, 뒤쪽에는 ‘열녀학생연재관처청송심씨지려상지이십년병진십이월일명정(烈女學生延載寬妻靑松沈氏之閭上之二十年丙辰十二月日命旌)’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그 옆에는 1910년에 후손 연명회(延命會)가 지은 ‘정후공정려이건기(靖厚公旌閭移建記)’가 걸려 있다

 

 

 

 

 

 아래 사진은 1984년에 음성군 원남면 문암리로 옮겨진 순흥안씨 정려는 문암리 ‘사오랑이’ 입구에 있다. 열녀문은 정면 1칸,측면 1칸의 겹처마 맞배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사면을 홍살로 두르고 양옆에 풍벽을 달았다. 정려각의 편액에는 ‘열녀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연진행처정렬부인순흥안씨지려(烈女折衝將軍行龍?衛副護軍延震行妻貞烈夫人順興安氏之閭)’라 하였고, 앞 처마에는 ‘열녀문(烈女門)’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또한 정려각 바로 옆에는 1987년에 연윤희(延潤熙)가 찬(撰)하고 연순흠(延舜欽)이 서(書)한 ‘정렬부인순흥안씨효열비(貞烈夫人順興安氏孝烈碑)’가 서 있다. 순흥안씨는 부호군(副護軍) 연진행(延震行)의 부인으로 병자호란 때 가족과 함께 피난을 갔다가 다음 해 조상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돌아왔는데, 이때 청군이 침입하자 남편을 위해 적의 칼을 막다가 함께 죽어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정조 20년(1796)에 세워졌다. 순흥안씨의 남편 연진행의 묘소는 행정구역상 광덕리에 속하는 구계 북쪽, ‘사오랑이’ 입구의 남쪽에 북쪽을 바라보며 있다. 묘비와 상석에 모두,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곡산연공진행지묘배정렬부인순흥안씨부(折衝將軍行龍?衛副護軍谷山延公震行之墓配貞烈夫人順興安氏)’라 하였다.

 

 

 

 

 

연사종(1366~1434)은 상장군 연단서(延丹瑞)의 후손으로, 곡산연씨(谷山延氏)의 실질적인 시조(始祖)이다.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으로 자(字)는 불비(不非)이고, 함흥 출신이다. 연사종은 조선 초기 태조대(太祖代)에서 세종대(世宗代)까지 4대조의 공신을 역임한 큰 인물이었다. 고려 우왕 14년(1388) 요동정벌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요동정벌에 참여한 공로로 조선이 개국되자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봉되었으며, 태조 2년(1399)에 회군공신(回軍功臣) 3등에 책록되었다. 태종 1년(1401) 제2차 왕자의 난 때에 정안군파에 가담하였고, 정안군이 세자로 책봉되고 등극하는 과정에서 공로가 많아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다. 태종 10년(1410) 동북면병마절도사(東北面兵馬節度使)가 되어 여진족의 침입을 방어했으며, 이 해에 길주도도안무찰리사(吉州道都安撫擦理使)가 되어 경원부와 경성에 입성,수복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간룡성 싸움에서 패배하여 탄핵을 받고 함주(咸州)에 유배를 당하기도 하였다. 1411년 12월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퇴임하였고, 이듬해에 동북면도순문사(東北面都巡問使)가 되어 함주군 일대에 있는 4조왕과 비의 능(陵)을 조성하고 정비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1413년에 영흥부윤을 겸직했으며, 위의 공로로 인해 곡산군(谷山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에 노모의 병환을 간호하기 위해 사직하려 하였으나 허가받지 못하다가 왕으로 시연(侍宴)을 받고 휴가를 받았다. 그는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흙 베개를 베고 초막에서 시묘살이를 하여 조정으로부터 정려를 받았다. 모친상을 마치고 태종 16년(1416)에 다시 등용되어 삼군도진무(三軍都鎭撫)가 되었고, 태종 18년(1418)에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에 갔다 오면서 의서와 약재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세종 1년(1419)에 훈신에 대한 예우로 판중군도총제부사(判中軍都摠制府事)에 오르고, 세종 4년(1422)에 곡산부원군(谷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세종 8년(1426)에 의정부참찬(議政府參贊),중군도총제(中軍都摠制)를 역임하였다. 연사종의 묘소는 서울시 성북구 하계동에 있었으나, 개발로 인하여 지금은 화성리 ‘명암’의 주실산 묘역에 모셔져 있다. 또한 경기도 양주서원에 있던 정려도 ‘명암’으로 이전하여 보호하고 있다.

 

 

 

 

 

 

 

청송심씨는 정조 16년(1796)에 남편이 죽자 따라 죽을 것을 결심하고 남편의 시신 염습을 마친 후 6일 후에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단청을 새로하여 산뜻하니 참 좋았다 흠이라면 효열문이 자리한곳이 자리가 조금 좁은듯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