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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금암리 전엽효자각(東二面 金岩里 全燁孝子閣) 본문
동이면 금암2리 마을회관옆으로 자리하고 있는 전엽의 효자문 입니다.
길가에 위치하고 있어 접근성도 좋으며 주위로 전엽과 관련된 호천과 그리고 옥천전씨가문과 관련된 양신정과 목담영당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전엽의 무덤은 효자문 뒤에 자리하고 있으며 옥천전씨의 다른 무덤들도 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약 400여년전에 옥천군 동이면 금암리 신촌마을에 전엽이라는 효자가 있었다.
그의 아버지는 강릉감사로 발령되였으나 부임은 하지 않았다.청백리로 선정되였고 목담영당에 제향되여 있다.
부친상을 당한 전엽효자는 정성을 다하여 장례를 마치고 묘소옆에다가 여막을 짓고 여막에서 지내며 3년간을 거상하였다.
시묘살이를 하던중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에는 식망차례를 정성껏 지냈다. 그런데 그때마다 어디서 날아오는지 산꿩이 한마리씩 날아와서는 떨어져 있었다.
전엽효자는 이를 기이하게 생각하면서도 삭망차례때마다 그 꿩으로 제물을 장만하여 제를 지내곤 하였다.
또한 기이한일은 난데없이 커다란 호랑이가 한마리 묘앞에 나타나 앞발로 땅을 후벼파는 동작을 여러번 하였다.
전엽효자가 구 호랑이가 후벼파던 자리에 가서 자세히 살펴보니앞발로 파놓은 곳에서 생수가 솟고 있었다.
그 때에는 가뭄과 함께 온마을이 마실물이 부족하여 크게 고난중이였는데 호랑이가 파놓은 물맛 좋은 샘물은 온마을 사람들의 식수원이 되였다.
전엽의 지극한 효행사실이 알려지자 효자로 정려하여 정문을 세웠다.
편액에는 "효자조산대부행이산현감전엽지려(孝子朝散大夫行尼山縣監全燁之閭)라 쓰여있고 정문은 문중에서 관리보존하고 있다.
이는 동물이라도 부모를 섬기는 전엽효자의 효심에 감동하여 어려움을 해결해주는 하늘의 뜻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호랑이가 알려준 샘물이라 하여 그 샘물의 이름을 호천이라 하고 지금까지 현지에 옛모습대로 전해오고있다.
전엽이 60살 되던해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아버지 때와 똑같이 정성껏 장례를 치뤘다. 또한 마찬가지로 묘소옆에 여막을 짓고 삼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명종 21년(1566년) 1월19일
[효성 지극한 전엽 선생이 효자로 포상받다]
군내에서는 이름난 효자인 전 엽(全 燁) 선생의 효행이 조정에 알려져 명종 임금이 효자로서 정려하고 벼슬을 내린 날이다. 실록에는 『옥천 거주 생원 전엽 〈천성이 순근하여 사람을 성심으로 대접하고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겼다. 그의 아비인 목사 전팽령(全彭齡)이 치사(致仕·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한 뒤로 빈궁하여 끼니도 자주 어려워지자 전엽이 힘을 다해 봉양하여 맛있는 음식을 적극 마련하였고 그 음식이 남으면 반드시 아비가 주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주고자 하였다.
혼정신성(昏定晨省·저녁에 이부자리를 보고 아침에 자리를 돌본다는 뜻으로, 자식이 아침저녁으로 부모의 안부를 물어 살핌을 이름)하여 슬하를 떠나지 않고 항상 옆에서 모시는 것을 의무로 삼았으며 사환(仕宦·벼슬살이를 함)에는 뜻이 없었다. 기유년에 아비의 명령을 어기기 어려워 향시(鄕試)에 장원하였으나 관직을 얻는 것에 급급하지 않아 회시(會試)에는 응시하지 않았으니 이는 혼정신성을 빠뜨릴까 염려해서인 것이다. 평소 오가는 빈객이 그 아비를 방문하면 몸소 반찬을 마련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였고 병을 간호할 적에는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옷에는 띠를 풀지 않았다.
대고(大故·어버이의 상사)를 당하여서는 치상 절차를 일체 가례(家禮)를 따랐고…(중략) 계모를 섬기는 데 한결같이 지성으로 하였고 족친 중에 빈궁하여 오갈 데 없는 이를 가엾게 여겨 구제해 주곤 하였다.…(중략) 향당(鄕黨·자기가 태어나 살고 있는 시골마을, 또는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이 그 효우를 일컫고 여리(閭里·인가가 모여 있는 곳)가 그 행의에 탄복하였다〉에게 문려(門閭)에 정표를 하고 벼슬로 포상하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효자문은 동이면 금암리 신촌마을에 있으며 호랑이샘이 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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