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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면 연주리 초계주씨주황위령비(安南面 蓮舟里 草溪周氏周璜慰靈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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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남면 연주리 초계주씨주황위령비(安南面 蓮舟里 草溪周氏周璜慰靈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9. 8. 11:26

 

안남면 연주리 초계주씨 사당인 영모사앞에 자리하고 있는 비석입니다.

초계주씨의 시조 한림학사를 지낸 주황의 위령비 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초계주씨시조한림학사휘황위령비(草溪周氏始祖翰林學士諱璜慰靈碑)라고 적혀있습니다.

 

 

 

 

 

 

초계주씨는 주(周)씨는 중국 주나라의 왕손으로 주나라가 망한 후에 후손들이 성을 주씨라 했다. 후손 주황(周璜)이 당나라 말에 한림학사로 있다가 907년(신라 효공왕11년) "오계의 난(五李之亂)"을 피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초계에  살았다. 그래서 후손들이 초계를 본관으로 삼았다. 초계는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의 지명이다.

 초계주씨 족보에 의하면 주황의 후손에서 상주(14세손), 장흥(12세손), 삼계(12세손), 함안(12세손), 안의(13세손) 등으로 본관이 나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종친회의 주장은 이와는 다르다.  시조 주황의 아들 주흥인(周興寅)은 신라 효공왕 때 집사성대사에 올랐으며 시중을 거쳐 아간에 이르렀다. 그는 고려 목종 때 보문각 대제학을 지낸 손자 주빈(周斌)과 함께 가문을 중흥시켰다. 초계주씨의 인물은 고려시대에 예부상서를 지낸 주세후(周世侯)를 비롯하여 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를 지낸 주호(周鎬), 평장사를 지낸 주렴(周濂), 호조판서를 지낸 주원의(周原義) 등 여러 관직자들이 있다.

 6세손 주세후는 고려 선종 때 임원후 등과 함께 황급탑과 국청사를 창건하고 < 오복상피식 >을 개정하는 등 하례식의 예법도를 개정했다. 그의 아들 주지(周砥)와 주절 형제 후손에서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주형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예의판서를 지냈다. 조선이 개국되고 태조 이성계가 형조판서를 임명했으나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다.

 주희(周禧)는 공조판서를 지냈다. 주세흥(周世興)은 호조참판을 지냈으며  중종 때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으로 금성군에 봉해졌다.

 검교장군 주치(周稚)의 아들 주원의(周原義)는 도적을 토벌하여 왕으로부터 상방검을 하사받았으며, 개국원종익대이등공신으로 예조판서에 올라 팔계군에 봉해졌다. 주상창(周尙昌)은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주명신과 이괄의 반란을 진압하고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주몽득(周夢得)도 뛰어났다. 특히 주몽득은 임진왜란 때 추령에서 왜적을 나무로 만든 활로 대파했다.  공주 판관을 역임한 명흠(命欽), 공조참의 경손(敬孫), 공조참판 만량(萬良) 등도 가문을 빛냈다. 초계주씨는 조선시대에 무과 1명, 사마시 4명, 역과 1명 등 모두 6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주몽득의 송덕비도 영모사앞에 자리하고 있으며 주명흠의 비와 묘소는 증펑 남하리에 있다.

 

증평읍 남하리에 위치하고 있는 공주판관을 지낸 주명흠의 묘소입니다.

 

 

 

[초계주씨의 시조인 한림학사 주황의 영정/후대에 자손들에 의하여 복원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