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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이면 석탄리 김상기효자문(東二面 石灘里 金相基孝子門) 본문
김상기는 옥천군 동이면 석탄리 안터마을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아홉살때 그의 어머니가 두부를 먹고 체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일로 하여 김상기도 평생 두부를 먹지 않았다.
아버지가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다시 재취를 하여 계모가 들어와서 살게 되였는데 성질이 몹시 괴팍하고 포악하여 항상 집안이 불안하게 되였다.
이에 아버지가 계모를 폐출하려고 하자 계모에게 자신이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여 그러하니 같이 살게 해달라고 아버지에게 간청하고 만류하였다.
이에 이를본 계모도 이 어린 아들의 넒은 아량과 효심에 감동하여 아들에게 친자식처럼 사랑을 쏟으니 가정은 평화와 행복을 되찾게 되였고 김효자는 더욱 더 부모를 극진히 모시게 되였다.
그 후 그의 아버지가 병이 들어 신음하고 있을때에 김상기 효자는 강에 나가 잉어를 잡아다가 보양을 해 드렸고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약과 의원을 찾아 병 치료에 힘을 썼다. 그러나 그의 정성이 지극하니 병도 쉽게 치유되였고 건강하게 사시다 천수를 누리고 돌아가시자 온 정성을 다하여 장레를 지냈다.
그는 인정이 많아서 어려운 처지에 처헌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었다. 집안사람이나 마을의 이웃사람들이 가난하여 곤란에 처하게 되면 사재를 털어 도와주었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이웃이 있을적에는 함께 힘을 합쳐서 도움을 주었다.
이렇게 베푼 많은선행이 많은사람에게 모범이 되었고 "적덕지가(적積德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고 그의 효행과 적선이 널리 알려졌다.
덕을 많이 쌓은 집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있다.그리하여 동이면 석탄리 안터마을에 정문을 세우게 되였다.
효자문 정려에는 "효자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행용양휘부호군 김상기지려(孝子 嘉善大夫 同知中樞副使 行龍陽徽副護軍 金相基之閭)라고 기록되여 전해지고 있다.효자문은 안터마을 뒷쪽 얕은 언덕에서 마을을 내려보고 있다.
효자문 한쪽으론 김상기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
김상기의 신도비의 전면에는 효자행가선대부공조참판도재김선생휘상기신도비(孝子行嘉善大夫工曹參判度齋金先生諱相基神道碑)라고 적혀있으며
뒷쪽으로는 근래에 새로 신축한 재실이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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