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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성면 의암마을 임인수송덕비(仰城面 衣岩마을 林仁洙頌德碑)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앙성면 의암마을 임인수송덕비(仰城面 衣岩마을 林仁洙頌德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0. 3. 16:17


임인수송덕비(林仁洙頌德碑)가 자리하고 있는 의암마을은 앙성면 단암리에 속한다

단암리는 앙성면 행정리명으로 행정구역 개편 전의 이름인 검단리()와 의암리()에서 ‘단()’자와 ‘암()’자를 따 ‘단암()’이 되었다.

본래 충주군 앙암면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의암리()·검단리·중방리()와 서암리(西)의 일부가 통합되어 단암리로 개편되었다. 1956년 7월 8일 충주읍이 충주시로 승격됨에 따라 중원군에 속하게 되었고, 1995년 1월 1일 중원군이 충주시와 통합되면서 충주시 앙성면 단암리가 되었다.





선생은 1929년 1월 14일 (음력)이곳에서 태여나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가난하게 보내셨다. 일찌기 가난을 떨치겠다는 일념으로 상경하여 사촌형집에 기거하며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해 형님의 신임을 얻어 버스운전이란 어엿한 직업을 갖게 되였다. 조식을 고구마로 때우기도 하고 심지어는 추운겨울에는 버스안에서 기거하며 돈을 모아 운수사업을 하게 되였고 그 사업을 기반으로 엄청난 부를 이루어 오늘에 이르게 되였으니 그 자린고비의 절약정신은 길이 우리들의 귀감이요 자수성가의 높은 뜻은 우리 의암리의 자랑이니 만세에 그 뜻이 빛날것이며 선생과 같은 제2,제3의 인물이 우리동리에서 태여날것을 굳게 믿노라 선생은 평소에도 불우한 이웃을 보면 주머니를 털으시기를 마다하지 않으셨고 지역사회를 위하여 봉사 헌신봉사하여 서울시 중량구민들의 칭송이 끊이지 않았으니 또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닌가.또한 선생은 1990년 재경향우회를 창립하는데 기여하셨고 제 1대 회장으로 재임하시며 물심양면 향우회 발전에 큰도움을 주셨다. 비록 일찍 고향을 떠나셨지만 늘 고향을 사란하는 마음은 변함이 없으셨고 언젠가는 고향을 위해 일조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계시던 터에 적지않은 돈을 발전기금으로 희사하셨으니 내 고장의 기쁨이요 우리 동민의 자랑이니 그 뜻을 이룩한 숭고한 공덕을 어찌 말로만 다할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 회원들은 고향발전에 헌신하신 선생의 높은뜻을 기리기 위하여이 송덕비를 세워 그 공을 후세에 전하고자 하노라/ 안백룡 글



단암리의 서쪽은 오갑산[609m] 줄기의 능선이 이어져 있어 높으며, 동쪽은 남한강이 남북 방향으로 흐르면서 유역에 평야가 형성되어 있다. 남쪽은 선바리고개를 경계로 중정리가 있다.이 지역은 삼도 경계 지역으로 강가의 땅이 비옥하여 벼를 재배하여 쌀·감자 등을 생산하며, 특히 단무지를 생산하여 높은 소득을 올리고 있다.

1943년 3월 31일 개교한 단암초등학교가 1992년 3월 1일에 학생수 부족으로 강천초등학교 단암분교장으로 되었다가 1993년 3월 1일 폐교되었다. 문화 유적으로는 단암 일대에서 선사시대의 민무늬토기, 빗살무늬토기, 토기용후, 청동기시대 집터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은 선사시대부터 물고기를 잡으며 사람이 살아왔던 곳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곳은 사금을 캐던 곳으로 강변에는 아직도 크고 작은 사막 웅덩이의 흔적이 남아 있다.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으로 넘나들던 개치나루터는 지금은 큰 느티나무만 남아 있고, 느락골에서 한강을 건너던 좀재나루터는 자취만이 있다. 단암리~원주시 부론면을 연결하는 다리가 놓여 교통이 편리하다.
단암리 [丹岩里]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의암(衣岩)이라 불리는 옷바위는 마을뒷산 고향산에 있는 바위로서 남한강쪽 비탈에 위치하고 있는데 멀리서보면 마치 치마를 두른것처럼 보인다고 옷바위라고 이름을 붙이고 있다. 그러나 현재는 나무가 많이 우거져서 옷바위가 잘안보인다.

토굴처럼 생긴 벼랑끝 커다란 바위아래에서 굵은 돌을 던지면 한참구른후 돌떨어지는 소리가 들릴정도로 깊은 자연굴이 있었으며 벼랑위에 가을이되면 담쟁이 덩굴같은 식물들이 가득하여 알록달록 예쁜치마를 두른 듯 굴입구를 둘러싸고 있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한다.

현재는 자연스럽게 메워진 것으로 보이고 그 후 작은 기도처로 변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