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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의림사명청동금고(淸州博物館 義林寺銘靑銅金鼓) 본문

박물관 구경하기/청주박물관(淸州博物館)

청주박물관 의림사명청동금고(淸州博物館 義林寺銘靑銅金鼓)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0. 7. 06:39

 

 

 

국립청주박물관에 있는 의림사명 청동금고입니다.금고를 소개해놓은 표에 약간의 오기와 의문점이 있어서 적어 놓아 봅니다.박물관을 다시 찾을때 의문점을 다시 생각해 봐야 할거 같습니다.대정30년 (1190년)고려시대.금나라 세종의 연호가 대정(大定)이였다.그런데 세종의 출생과 사망 연도는 1123-1189년이므로 수치상으로 맞지않고 일람표에도 한곳은 30년 다른한곳은 3년으로 표기되여 있다. 1190년은 송나라 광종() 소희() 원년, 금나라 장종() 명창() 원년이다.고려 명종 20년, 경술년(), 1190년 이다.

 

의림사지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한자 義林寺址-영어의미역 Euilim Temple Site
이칭/별칭 안림동 사지,이궁지(離宮址),대궐 터 - 분야 종교/불교,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유적/터
지역 충청북도 충주시 안림동 493|613 - 시대 고려/고려

 

충청북도 충주시 안림동에 있는 고려시대 절터.의림사지는 충주시의 동쪽 외곽에 위치한 마즈막재 아래에 세워진 고려시대의 사찰 터로서, 그동안 지명에 따라 안림동 사지, 이궁지(離宮址), 대궐 터 등으로 불렸다. 그러나 의림사지에 대한 문헌 기록과 자료가 전혀 없어 창건과 폐사 시기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사찰의 이름이 확인된 것은 1989년 충주대원고등학교 운동장에서 명문(銘文)이 적혀 있는 청동반자(靑銅飯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청동반자의 제작시기는 1190년(명종 20)에 해당한다. 또한 사찰의 이름이 의림사(義林寺)였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의림사는 ‘단속사대감국사탑비(斷俗寺大鑑國師塔碑)’에 대감국사 탄연(坦然)[1070~1159]이 1104년(숙종 9)에 왕명으로 중원 의림사에 주지하였다는 내용이 보이고 있어 고려시대의 명찰임을 알 수 있다. 한편 2002년의 지표 조사에서 현재 대원사의 충주철불좌상이 본래 의림사에 있었고, 1937년에 마하사로 옮겨졌다가 1959년에 대원사로 이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도 새롭게 확인되었다.

의림사지에 대한 조사는 2002년 9월 20일부터 2003년 2월 17일까지 이루어졌다. 조사 기관은 충청대학교박물관으로 유적의 현상을 파악하기 위한 지표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때 의림사 일대의 평면도를 작성하였고, 사역(寺域)의 중심으로 추정되는 과수원에 남아 있는 연화 대석과 건물지 기단 석렬에 대해 정밀 실측 조사가 이루어졌다. 한편 주변 지역에서 유물을 최대한 수습하기 위한 정밀 조사가 실시되었고, 석재가 반출된 곳으로 추정되었던 충주공업고등학교에 대한 조사도 병행되었다.조사 결과 첫째, 의림사지의 사역은 현재 연화 대석이 남아 있는 과수원 주변으로부터 대원고등학교까지로 추정되었다. 둘째, 사찰의 이름은 청동반자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는데, 의림사는 선종 계통의 사찰로 12세기 말까지는 법등이 이어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또한 청동반자의 명문 중에 충주의 호족 세력이 포함되어 있어 최대의 지방 세력이었던 충주유씨와 밀접한 관련을 지녔던 사찰로 확인되었다.셋째, 대원사 극락전에 봉안된 충주철불좌상은 충주 지역의 독창적인 양식이 반영된 불상으로서, 본래 의림사의 본존불로 봉안되었다가 사찰이 폐사된 이후에 노천불로 방치되었고, 이후 일제강점기 초에는 충주군청으로, 다시 본원사(마하사)로 옮겨지고, 1959년에 대원사로 이안되었다. 대원사 화재 이후에는 충주박물관을 거쳐 대원사 극락전에 봉안되었던 사실을 확인하였다. 사찰 터에서 발견된 연화 대석은 충주철불좌상의 대좌로서, 충주철불좌상 반출 이후 원위치를 이탈하여 방치되었던 것으로 추정되었다.한편 의림사지 출토 청동반자는 1989년 4월 25일 충주 대원고등학교의 운동장에서 정지(整地) 작업을 하던 중 이진성(李鎭成) 교사에 의하여 1점이 발견되었다. 이 반자가 출토된 지점은 1988년 5월 확장 작업 당시 이미 다수의 기와편과 석재가 출토되었던 건물지 부근으로 의림사지의 문지로 추정되고 있다. 출토 청동반자의 측면에 남겨진 명문은 다음과 같다.“충주목선의림사무신년도취인집중연주성현배시대정삼십년경술삼월일기동량부호장 유장보도인관심법명주지중대사유중(忠州牧禪義林寺戊申年盜取因集衆緣鑄成懸排時大定三十年庚戌三月日記棟梁副戶長劉張輔道人冠心法明住持重大師惟中)”현재 의림사지는 마을과 과수원 경작으로 인하여 상당히 많이 훼손되어 있으며, 사찰 주변에서 발견되었던 기와편들도 이제는 거의 수습되지 않고 있다. 과수원에는 중앙 부분에 불상의 대좌로 추정되는 연화 대석이 반쯤 매몰된 채 노출되어 있고, 그 옆에는 본래 팔각 중대석으로 보이는 중대석이 거의 원형에 가깝게 파손되어 남아 있다. 한편 그 동북쪽에는 건물지가 노출되어 있는데 규모로 보아 불단의 기단 석렬로 추정되고 있다.

연화 대석에는 복엽 8판의 연화문이 조식되어 있고, 연화문 윗면에는 8각으로 3단의 중대석 받침이 마련되어 있다. 크기는 지름 170㎝, 높이 69㎝이다. 한편 대원고등학교에서 발견되었던 청동반자는 현재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직경 45㎝, 폭 10.5㎝, 무게 20㎏이다.의림사는 고려시대 중원 지역에서 번창하였던 선종 사찰로서 주존불로 충주철불좌상을 봉안하였던 곳이다. 고려 숙종 때 대감국사가 이곳에서 주지할 정도로 매우 비중 있던 사찰로서 충주 지역의 불교 종파의 활동을 살필 수 있는 중요 자료라 평가되고 있다. 더욱이 현재 대원사에 봉안된 충주철불좌상 및 의림사지에서 출토된 청동반자는 미술사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휘 옹(). 여진명() 오록(祿). 시호 광천흥운문덕무공성명인효황제(). 종보(: 의 아들)의 아들. 1161년 해릉왕()의 남송() 정벌 실패로 국내에 소란이 일어나자, 당시 동경유수()로 있던 오록(세종)이 추대되어 즉위, 대정()이라  개원()하였다. 이어 해릉왕이 부하에게 살해되자 정식으로 금나라 제5대 황제가 되었다.세종은 전대()의 행정상의 과오를 시정하고, 국내에서는 관리의 숙정(), 재정의 긴축에 힘쓰는 한편, 여진족()에 대하여는 보호정책을 취하였다. 여진족이 중국에 이주한 뒤에 중국인에게 경제적인 압박을 받거나 토지를 빼앗기거나 하는 일이 없도록 토지를 정리하여 나누어 주고 여진어()를 장려하였으며, 고유한 풍속을 즐겨 국수주의()를 고취하기도 하였다. 또 밖으로는 평화정책을 취하여 남송과의 국교를 회복하는 데 힘썼다. 그가 다스린 29년간은 금나라의 황금시대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종 [世宗] (두산백과)

 

 

 

 

 

 

 

무신년에 도둑을 맞았다하면 고려명종18년(1188년) 무신년을 이야기한다.

고려 명종20년(1190년) 경술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