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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도장글씨기와조각(淸州博物館 印章瓦) 본문

박물관 구경하기/청주박물관(淸州博物館)

청주박물관 도장글씨기와조각(淸州博物館 印章瓦)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0. 15. 07:50





국립청주박물관에 전시되여 있는 도장글씨 기와조각입니다. 시대는 백제시대로서 발견지는 부모산성입니다.

부모산성은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비하동과 지동동의 경계에 위치한 부모산 정상부에 있는 삼국시대 산성입니다.

부모산성이 위치한 부모산은 청주시의 서쪽에서 가장 높고 크며, 눈에 띄는 산이다. 청주시 비하동과 지동동의 경계를 이루며, 경부고속도로의 청주나들목(I.C.)과 중부고속도로의 서청주 나들목 사이에 있는 231.7m 높이의 산이다. 본래 아양산, 악양산(岳陽山), 아미산 등으로 불리웠으나, 지금은 부모산으로 불린다.부모산의 지질구조는 쥐라기의 반상화강암이 지반을 이루고 있는데, 서남쪽 일정 범위만 섬록암으로 구성되어 있다. 산의 주변은 금강의 지류인 미호천(美湖川) 유역에 발달한 구릉과 충적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부모산은 청주시의 서쪽에서 가장 높기 때문에 사방의 산들을 마주 바라볼 수 있다. 남쪽으로는 직선거리 5㎞에 팔봉산, 약 10㎞ 지점에 문의와 경계를 이루는 봉무산, 부강과 경계를 이루는 복두산이 차례로 보인다. 서남쪽 방면으로는 은적산의 저산성과 복두산의 복두산성이 위치에 있다. 남동쪽으로는 봉무산을 거쳐 문의의 작두산성과 연결된다. 동쪽으로는 청주시내를 건너 우암산(牛岩山)[338m]과 청주 상당산성이 바라다 보이며, 북동쪽으로는 미호천(美湖川) 강안에 있는 평지의 청주 정북동 토성을 지나 강건너 북쪽의 목령산성과 마주본다. 서쪽으로는 조치원 방면의 병마산성 등과 연결된다.

이렇듯 부모산성이 위치한 지역은 사방의 일정한 범위 이내에 높은 산이 없다. 부모산이 가장 높이 솟아 있어 주변을 바라다 보기에 아주 좋은 곳이다.




부모산성에 대한 조사는 청주대학교 이원근 교수가 1982년에 처음 시도하였다. 이 조사는 공식적인 조사가 아닌 개인적인 차원의 조사였다. 공식적인 조사는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1987년에 시행하였는데, 이 조사 역시 개괄적인 조사에 불과하였다. 그 뒤 청주시가 부모산까지 확대함에 따라, 청주시의 의뢰를 받은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가 1999년에 대규모의 종합적인 지표조사를 단행하였다. 부모산성과 모유정의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한 것 역시 1999년의 조사 결과에 의해서였다.

그 뒤 2004년에 중원문화재연구원은 연화사 대웅전 증축부지와 북문지 일대를 각각 시굴 및 발굴조사하여 산성의 실체에 다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북문지 발굴조사 결과 내외겹축의 체성벽, 북문지, 수구지, 배수시설 등을 비롯해 인장와, 기와류, 토기류, 확쇠 등 부모산성의 역사적 시기와 당시의 사회상을 복원할 수 있는 자료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의 발굴조사에 의하면, 부모산성이 위치한 부모산은 산성이 축조되기 이전부터 사람들이 생활하던 곳이었다. 성내에서 발견된 움 유구가 그 흔적이다. 더욱이 인근지역에서 조사된 청동기시대의 주거지와 무덤유적, 부모산의 기슭에서 발견된 비하동 초기철기시대 유적은 당시 생활의 중심무대가 부모산과 그 주변지역이었음을 잘 말해준다.

적어도 청동기시대부터 사람들의 주요한 터전이 되어 온 부모산에 산성을 처음 쌓은 사람들이 누구였을까? 처음 이 지역을 지배했던 것은 백제이므로 백제가 축조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하나, 1999년 지표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회백색 연질토기편, 고구려 계통의 붉은 색 격자문 토기편, 신라시대의 화청색 경질토기편이 함께 출토되었다. 또한 2004년에 연화사 대웅전 증축부지에서는 퇴적토와 뻘층에서 백제와 신라·통일신라시대로 편년되는 유물이 동시에 출토되고, 북문지에서는 백제 유적지의 특징유물인 “前”자가 새겨진 인장와가 발견되었다. 따라서 부모산성은 백제 때 처음 축조된 이래 통일신라 때까지 존속하였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산성의 둘레는 옛 기록에 2,427척으로 되어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성벽 내측의 길이를 실측한 1,135m와 거의 일치한다. 전체적으로 삼각형 모양에 가까운 성벽은 수평을 유지하며 돌아가거나 굴곡되면서 오르내리는 입체적 구조로 되어 있다.

성벽은 현재 많이 훼손되어 있으나, 바깥 성벽의 하단부 부분은 대체로 보존되어 있다. 이들 성벽은 산의 경사면을 이용하여 밖에서 축조하였는데, 외면은 외측 하단의 기단 밖으로 1~2차에 걸쳐 보축을 하고 내면은 윗쪽에서 겹축하였다. 성벽의 너비는 최소 6.4~7m 내외, 높이는 대략 너비와 같이 축조되었을 것으로 본다. 발굴을 통해 확인된 북문터 성벽은 외측벽 높이 6~10m 이상, 내벽 높이 2~5m 이상, 성벽 너비 7m 내외의 내외 겹축의 견고한 석축으로 축조되었다. 그리고 북문의 규모는 길이 770㎝, 너비 450㎝, 높이 130~180㎝의 현문구조를 갖춘 성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부모산성과 북문의 위용을 짐작케 한다. 부모산성에는 외부의 적을 공격하기 좋게 축조된 곡성은 없다. 다만, 그와 같은 기능을 할 수 있는 돌출부는 여러 곳이 있다. 구체적인 성문터나 건물터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산성 북쪽의 평탄지가 북문터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산성 주변에는 초소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정되는 보루성이 3개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15권에는 “청주 서쪽 15리에 둘레 2,427척의 석축산성이 있고 가물 때에 성안에 있는 큰 연못에 기우제를 지내며 지금은 폐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부모산성 안에는 큰 연못이 있었다. 그렇지만 발굴조사 결과 큰 연못은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없었으나, 2004년 연화사 대웅전 증축부지에 대한 시굴조사를 통해 연못으로 추정되는 부석시설과 석축시설 일부를 확인하였다. 머지않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기록된 연못의 실체가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아직 큰 연못은 찾지 못하였지만, 산성 안에는 여러 전설을 간직한 모유정(母乳井)이란 우물이 있다. 모유정은 작은 할석으로 축조한 직경 3m 정도의 원형 우물인데, 그 아래는 직경 1m 정도이다. 전설과는 달리 수량이 많지 않다.

부모산성이 언제 어떻게 폐성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위『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기록으로 보아, 이미 조선시대에는 산성으로서 기능하지 않은 것만은 확실하다. 그렇지만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 위에 청주의 서쪽 산성으로서 크게 점 찍혀 있는 것으로 보아, 부모산성은 비록 폐성되었을지라도 청주지역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1999년과 2004년의 조사를 통해 어느 정도 윤곽이 드러난 부모산성은 2002년 1월 11일 충청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앞으로 사적지로도 지정될 전망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