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회남면 남대문리 양달해정려비(懷南面 南大門里 梁達海旌閭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회남면 남대문리 양달해정려비(懷南面 南大門里 梁達海旌閭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7. 07:40

 

 

 

 

회남면 남대문리에 있는 남원인 양달해의 정려비겸 효자비입니다.

 

남대문리는 본래 회인군(懷仁郡) 서면(西面)의 지역으로서 호점산성의 남문 밖이 되므로 남대문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만지동(晩旨洞), 거구리(巨九里)와 후곡리(後谷里) 일부를 병합하여 남대문리라 하고 회남면에 편입되었다.거구리에는 남원양씨(南原梁氏)제용감직장(濟用監直長) 양경(梁鯨)의 후손 들이  거주하고 있다.

 

 

 

 

비석에는 증조봉대부동몽교관효자양달해지비증영인효부안동김씨(贈朝奉大夫童蒙敎官孝子梁達海之碑贈令人孝婦安東金氏)라고 적혀있으며 좌우면과 후면에는 양달해의 행적이 적혀있다.

 

 

 

 

양달해는 남원인으로서 호는 치재(嗤齋)이며 자는 호연(浩然)이다.천성이 인자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어려서 부터 효동으로 이름이 자자했으며 18세에는 수암 권상하의 문하에서 학업에 정진하니 학업이 뛰여나고 충과 효가 남다르며 문장이 뛰여났다.일찌기 어머니가 큰병으로 백약이 무효하여 모숨이 위중하니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 단지함으로서 어마니에게 자신의 피를 흘려 드시게 하니 어머니의 병이 씻은듯이 나았다고 한다.이에 많은사람들이 양달해의 효성에 감탄하였다. 

 

 

 

그 후에 어머니가 천수를 누리시고 그의 나이 58세에 돌아가시니 어머니의 산소옆에 여막을 짓고 시묘살이를 하였다.이때 시묘살이를 하면서 양달해가 무릎을 꿇었던 자리에 하늘에 감동하여 영초가 자라니 여름에는 꽃이 피지 않았으며 겨울에도 잎이 마르지 아니하였다.또한 밤 늗은 시간에 산소와 집을 오가는 길에는 항시 커다란 호랑이가 양달해를 등에 태우고 다니니 많은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겼다.사람들은 양달해의 효성에 감동하였으며 양달해가 시묘하던 묘막이 있던 곳은 지금도 지명이 묘막이 되였다.

 

 

 

양달해의 처인 안동김씨는 양가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으며 또한 일가친척들에게도 우애로 항시 대하니 그 또한 양달해와 더불어 효성이 원근에 가득하였다. 이에 양달해와 그의부인인 안동김씨에게 조정에서 광무9년에 정려하였다. 

 

 

 

처음에는 정려문이 회남면 신곡리 일명 영당이라 불리우는 곳에 정려문을 세웠으나 1980년 대청댐이 건설되면서 정려문이 있던 영당이 물에 잠기니 이곳인 회남면  남대문리로 정려문을 옮겨 다시 정려문과 함께 정려비를 세웠다.

 

그 후 정려문이 오래되여 수리를 해야하고 단청등이 퇴색하니 2000년에 정부의 지원금과 더불어 문중의 돈을 합하여 새로 중수하였다. 몇번이고 찾은 양달해와 안동김씨의 정려문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찾아가는 날은 정려의 문이 무너져 있었다.조속히 수리를 함으로서 예전의 모습을 찾았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