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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면 금산리 금천사지(郡西面 金山里 金川寺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군서면 금산리 금천사지(郡西面 金山里 金川寺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15. 08:44

 

 

 

 

옥천군 군서면 금산4길 13-8 인근에 금천사 터가 있습니다.

약 6개월 정도에 걸쳐서 금천사지터를 발굴 하였다.금천사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중기까지 있었던 절이다.

마을이름이 금천리인 이유도 이곳에 금천사라는 큰절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리를 건너며 좌측으로 보이는 민가주위가 금천사지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 금천리 양짓말에는 금천사와 관련된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금천사유물로 추정되는 대형석조 1기와 부도 1기가 현재 금천사지 터를 지키고 있다.

서북쪽 바위절벽위에 있던 탑산 탑속에서 옛날에 7층동탑과 금불상이 발견되였다고 한다.

절의 기왓장도 인근에서 많이 발견되고 한다. 발굴시 발견된 기와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원래의 석조의 자리는 마을 중앙이였는데 집이 지여지며 또는 도로가 나며 이리 저리 밀리다가 개울가에 방치되다시피 놓여 있었다.

현재 석조는 금천사지로 추정되여 발굴조사를 마친 곳에 옮겨져 있다.석조의 크기는 길이245 폭은 160 높이 70이며 석조의 두께는 15 석조의 바닥에는 10센티정도의 구멍이 있어 배수구로 사용하였다.석조는 물을 받아 쓰거나 또는 김장등을 담글때 요긴하게 사용하였다.

 

 

 

 

 

집을 짓기위해 터를 팔때 사지의 유물이 발견되므로 약 6개월에 걸쳐 절터의 발굴을 마치고 현재는 유물이 나오지 않는 쪽으로 집을 지을 준비를 하고 있다. 석조는 금천사지로 추정되는 곳에 터를 마련하여 옮겨 놓았다.

 

 

 

 

 

금천사지로 추정되는 곳을 발굴하며 나온 여러 주초석등으로 쓰였을 석재들이 놓여있다.

울타리 너머까지 그 시절의 석재등이 지금도 눈에 띄인다.석조의 귀부부분은 파손되여 있다.

 

 

 

 

 

대형석조가 있는 곳에서 약 50여미터 떨어진 민가의 한쪽에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자연석을 대석삼아 오늘도 부도는 세월을 곱씹고 있다. 민가정원에 부도 몸체부분만이 자리하고 있다.

석조옆에 있던 구멍이 있는 석재(사리공?)가 부도의 기단석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부도날이라고 불리우는 곳의 끝머리에 부도가 자리하고 있다.

 

1914년 행정구역의 전면조정 때 일소면과 이소면을 합하여 다시 군서면으로 고치면서 이때 월서화리를 동평리와 금산리로 나누었다. 금산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마을을 합쳐 새로운 리동을 만들면서 금이 많이 나는 광산이 있었고 조선시대 중기까지 금천사라는 큰절과 서대산에서 내려오는 맑고 깨끗한 큰 하천이 있기 때문에 붙은 금천(金川)과 신라 때 고시산군의 소재지였다는 ‘시림이’(식율평(食栗坪), 시름뜰)를 시루로 해석하여 시루증(甑) 자와 뒤에 산이 있다 하여 메산(山) 자를 써서 증산(甑山)이라 부른 증산에서 각각 한 자씩을 딴 것이다.

금천리 양짓말에는 큰 절이 있던 흔적이 있다. 이 절은 임진왜란 때 고암 정립 선생이 금천사(金川寺)에서 공부를 했다는 일기를 쓴 것으로 보아 임진왜란 직전까지는 절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마을에는 물을 받았던 큰 석조와 부도가 있어 부도날이라고 불렀던 지형이 있고, 영동 영국사에서 텃세를 받다가, 20여년 전에 주민들에게 터를 매각했다고 전한다.


서대산과 장령산을 휘돌아 수려한 자연을 빚어낸 금천계곡은 옥천군내에서는 가장 아름다운 계곡으로 손꼽히며 여름철 대표적인 행락지다. 조헌 선생이 우리 고장 아홉 곳의 절경을 시로 풀어 ‘율원구곡가(栗園九曲歌)’를 지었는데, 그 곳 중 하나가 금천계곡과 장현봉(장령산)이었다.

현재 장령산휴양림이 조성돼 해마다 여름이면 많은 사람들을 숲속으로, 계곡으로 끌어들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