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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개심리 영모재(伊院面 開心里 永募齋)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이원면 개심리 영모재(伊院面 開心里 永募齋)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6. 11. 25. 08:37





영모재(永慕齋)는 이원면 개심리에 있는 양주조씨의 재실입니다.

개심 저수지를 바라보며 얕은 언덕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넒은 잔디빝과 관리사가 있으며 숭조기념비가 서있습니다.



적벽돌과 콘크리트를 이용하여 현대식건물로 건축하였습니다.잔디빝으로 마당을 깔았으며 적벽돌로 담장을 둘렀습니다.



양주조씨는 경기도 양주에 본관을 두며, 고려 때 양주호장(), 판중추부사()를 지낸 조잠()이 시조이다.

세도 가문은 아니나 조선 중기 이후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였다. 시조 조잠()의 증손대(조선 전기)에서 정평공파(:)·문강공파(:)·제학공파(:)·강화공파(:)의 4형제로 대별된다. 그러나 정평공파와 제학공파는 1453년(단종 1)의 계유정난()에 김종서() 일파로 몰려 죽음을 당함으로써 현재 그 후손이 얼마 되지 않는 것으로 전한다. 따라서 양주조씨의 숱한 인물들은 문강공 조말생의 후손으로서 오늘날 문강공은 사실상 중시조가 된다고 한다.

양주조씨 일문이 번성하기 시작한 것은 조말생의 손자인 조정()이 1619년(광해군 11)에 우의정에 오름으로써 시작된다. 인조의 국구()가 된 조창원(), 현종 때의 형조판서 조계원()에 이어, 조계원의 아들 7형제에 이르러서는 숙종·정조 시대에 걸쳐 그 세력의 절정을 이루게 되었다. 그러나 숙종 때에는 같은 집안이면서도 노·소론() 양파로 갈라져 당쟁의 극렬상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7형제 중 둘째 조구석(), 셋째 조희석(), 넷째 조사석(), 다섯째 조가석() 등 4형제의 후손이 번창하였는데, 조희석의 후대는 노론()으로, 조사석과 조가석의 후대는 소론()으로 갈라져 집안끼리 당쟁을 벌였다. 대표적 인물로는 을사조약 때 기울어지는 국운() 앞에 충의를 다하다 자결한 조병세()를 들 수 있다.

 양주조씨 [楊州趙氏]





개심리는 충청북도 옥천군 이원면에 있는 리()이다. 

마을 뒤로 천태산이 있으며, 앞으로는 이원천이 흘러나가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개심골(개심곡), 노루목(장항), 북개리, 살구정이(행정), 새말(신촌), 새터(신기), 장왜(남개리, 장화) 등이 있다. 개심골은 마을에 개심사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노루목은 지형이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 하여 생긴 지명이고, 살구정이는 마을에 살구나무 정자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장왜는 새김리의 중심 마을로, 새말은 장왜 서북쪽에, 새터는 서남쪽에 새로 된 마을이라는 뜻이다. 마을 명소로는 개심저수지가 있다. 개심리 [Gaesim-ri, 開心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