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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최명길묘2(北二面崔鳴吉墓2)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북이면최명길묘2(北二面崔鳴吉墓2)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6. 22. 18:32

 

 

 

 

 

 

 

 

 

 

 

 

 

 

 

1586(선조 19)~1647(인조 25).

조선 중기의 문신.
최명길의 글씨 /최명길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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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질을 중시하는 양명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청(淸)나라의 침입 때 주화론(主和論)을 주장하여 강화를 담당했으며, 인조대 후반에 국정을 담당하면서 정치사회개혁을 추진했다.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겸(子謙), 호는 지천(遲川)·창랑(滄浪). 아버지는 영흥부사를 지낸 기남(起南)이다. 이항복(李恒福)과 신흠(申欽)의 문인이다. 1602년(선조 35) 성균관 유생이 되었으며 1605년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을 거쳐 성균관전적이 되었다. 1614년(광해군 6) 폐모론(廢母論)의 기밀을 누설했다 하여 파직당했다. 그뒤 가평으로 내려가 조익(趙翼)·장유(張維)·이시백(李時白) 등과 교유하며 양명학 연구에 힘썼다. 1623년 김유(金瑬)·이귀(李貴)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일으켜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졌다. 그뒤 이조참의·이조참판·부제학·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1620년대 중반 후금(後金)의 위협에 대해 척화론(斥和論)이 조정의 다수세력을 차지했는데 그는 이에 반대하여 겉으로는 화약을 맺고 안으로는 군대를 양성하여 명(明)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주화론을 주장했다.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왕을 호종(扈從)하고 강화를 주장하여 후금과 형제의 맹약을 맺도록 했다. 이듬해 경기도관찰사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우참찬·판의금부사·이조판서·호조판서를 역임했다. 1636년 한성부판윤을 거쳐 이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 청나라 군대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자 홍익한(洪翼漢) 등의 척화론·주전론에 대해 다시금 주화론을 주장하여 청나라와 강화하는 데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고 항복문서를 초안했다. 이듬해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영의정을 지내며 포로석방과 척화신(斥和臣)의 귀환을 교섭했으며 명나라 공격을 위한 청나라의 원병 요구에 대해 소극적 태도를 취한 조선의 처지를 변명했다. 1642년 다시 영의정이 되었으나 앞서 조선이 명나라와 내통한 사실이 밝혀져 그 관련자로 선양[瀋陽]에 잡혀가 억류되었다. 1645년 풀려나 귀국하여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에 진봉(進封)되었다. 그뒤 현직에서 물러나 저술에 몰두하다가 죽었다.

그는 인조대 후반에 국정을 주도하면서 양난으로 피폐해진 농촌경제와 국가재정의 충실을 꾀하기 위해 양전(量田)의 실시와 부세제도 및 군제의 개혁을 주장했다. 부제학으로 있을 때는 대동법(大同法)의 시행이 재론되자 그 선행조건으로 호패법(號牌法)의 실시를 주장하고 호패청당상이 되어 이를 관장했다. 한편 당시 붕당정치의 폐단이 이조낭관(吏曹郎官)의 자천권(自薦權)과 삼사(三司)의 서사법(署事法) 및 피혐(避嫌)에서 온다고 인식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하고 낭관의 권한을 제한하며 양사에서의 쟁단을 막아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했다. 문장에도 뛰어나 일가를 이루었으며 글씨는 동기창체(董其昌體)로 유명하다. 저서로는 〈지천집〉·〈지천주차 遲川奏箚〉 등이 있다. 박천의 지천사우(遲川祠宇)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다음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