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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 최명길신도비(北二面 崔鳴吉神道碑) 본문

통합청주시/청원구(淸原區)

북이면 최명길신도비(北二面 崔鳴吉神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6. 21.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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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의정 완성부원군(完城府院君) 최공 신도비명

재주는 위급에 처하여 망할 것 같은 한 시대의 화(禍)를 구원할 만하며, 식견은 중론(衆論)이 미심쩍게 여기는 의혹을 깨뜨릴 만하며, 충성은 사직(社稷)을 위한 계책을 세울 뿐 자신의 몸이나 제 집안은 돌아보지 않으며, 용맹은 호랑이와 이리의 발톱과 입술을 주무르면서도 안색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는 것, 이것은 모두 천하에 지극히 어려운 일로서 군자가 깊이 인정하는 덕목이다. 상국(相國) 문충공(文忠公) 같은 분은 대개 그 지조를 보존하고 공업(功業)을 세웠으니, 어찌 광명정대함이 전후(前後) 고금(古今)을 통틀어 탁월하지 않겠는가.
그가 마음을 괴롭히고 정성을 쏟았던 것은 비록 신명에게 질정(質定)할 수 있으나, 홀로 터득한 견해는 대중과 같지 않았으며 깊이 도달한 의론은 시속과 함께하기 어려웠으니, 이 때문에 비난하는 여론이 사방에서 일어나 거의 한 세상을 잠기게 할 정도였다. 그러나 천명(天命)으로 정해진 것은 종국에 반드시 이기며 인심은 속일 수가 없음은 백 년이 지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원문 2행 해독 불능-- 이에 이르러서 공이 평소에 마음을 스스로 고요히 하였던 것을 천하 후세에 말할 수가 있어 부끄러울 것이 없다.
공의 휘(諱)는 명길(鳴吉)이요, 자(字)는 자겸(子謙)이며, 성은 최씨(崔氏)이다. 그 선조는 전주(全州) 사람으로 고려 때부터 본조(本朝)에 이르기까지 명성과 덕망이 서로 이어져 내려왔다. 증대부(曾大父) 휘 업(嶪)은 빙고(氷庫) 별제(別提)를 지냈는데 이조 판서에 증직(贈職)되었으며, 대부(大父) 휘 수준(秀俊)은 벼슬을 하지 않았는데 좌찬성에 증직되었으며, 부(父) 휘 기남(起男)은 영흥 부사(永興府使)를 지냈는데 영의정에 증직되었다. 3세가 관직에 증직되었는데 모두 공이 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의정공(議政公)의 호(號)는 만옹(晩翁)인데 젊어서 우계(牛溪)의 문하에 수학하여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알려졌으나 당대에 배척을 받아서 벼슬은 달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전주 유씨(全州柳氏)인데 관찰사 영립(永立)의 따님이다.
공은 선조 19년 병술년(1586년)에 태어났다. 을사년(선조 38, 1605년)에 생원과에서 장원을 하여 이로 인하여 문과(文科)에 뽑혔다. 신현헌(申玄軒)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자겸(子謙)은 비록 재주가 넘치는 게 흠이기는 하나 결국엔 반드시 세상에 이름을 떨치는 그릇이 될 것이다.” 하고 승문원(承文院)에 선발하였다. 기유년(1609, 광해군 1)에 춘추관(春秋館)에 천거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전적(典籍)에 제수되어 몇 년간 봉직했으며 감찰(監察)과 제조(諸曹)의 낭청(郎廳)을 역임했는데, 모종의 일에 연루되어 삭출(削黜)되었다.
병진년(광해군 8, 1616년)에 모친상을 당하였고 기미년(광해군 11, 1619년)에 부친상을 당하였다. 광해군이 도리를 잃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학살하고 대비를 유폐하자 공은 제공(諸公)들과 더불어 큰 계책을 수립할 것을 비밀리에 의논하였다. 제공이 사저(私邸)에서 인조(仁祖)를 알현하였는데, 공은 홀로 달갑게 여기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의(義)로운 일에는 사적으로 알현함이 없어야 한다.”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의론이 때가 아닌 것으로 결정되었다. 공은 날짜를 오래 끌게 되면 큰일을 그르치기 쉽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날을 잡아 거사할 계획을 정했다.
계해년(인조 1, 1623년) 3월 계묘일에 인조를 받들어 대통(大統)을 계승하고 서궁(西宮)에서 대비(大妃)를 영접해 왔다. 맨 먼저 이조 좌랑에 제수되었다가 이조 정랑으로 자리를 옮겼으며, 여름에 이조 참의로 발탁되어 제수되었다. 이해 겨울에 정사공신(靖社功臣) 일등에 책봉되었으며 위계가 올라서 완성군(完城君)에 봉해지고 이조 참판이 되었다.
갑자년(인조 2, 1624년) 봄에 역적 이괄(李适)이 군사를 일으켜 반란을 꾸미자 임금을 모신 대가(大駕)가 남쪽으로 피난을 갔다. 이때 공은 총독부사(摠督副使)가 되었는데 마침 장원수(張元帥)가 안령(鞍嶺)에서 적을 물리쳤다.
을축년(인조 3, 1625년) 봄에 차자(箚子)를 올려 관제(官制)를 논하고 옛 제도를 다소 회복하여 바른 도리로써 근본을 다스릴 것을 청하였으나 쓰여지지 않았다. 부제학(副提學)이 되어 대사헌(大司憲)으로 옮겼다가 얼마 후 부학(副學 : 역자주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차자를 올려 12가지 일에 대해 진달하였는데 모두 당시의 병통을 적절히 지적한 것이었다.
상(上)이 처음 임금의 자리에 등극하였을 때 원종(元宗)을 추존(追尊)하여 대원군(大院君)으로 삼고 인헌왕후(仁獻王后)를 계운궁(啓運宮)으로 삼았다. 병인년(인조 4, 1626년)에 인헌왕후가 서거하자 상이 삼년복을 입고자 하였다. 조정의 의론은 인후(人後 : 다른 사람의 집에 양자로 들어가는 것, 여기서는 인조가 대통을 이은 것을 인후로 보았다)가 되었기 때문에 참최복(斬衰服)을 두 번 입을 수 없다고 하여, 삼사(三司)가 합계(合啓)하여 쟁론하였다. 상은 또 장기(杖朞 : 상주<喪主>가 상장<喪杖>을 짚고 생 베로 지은 상복을 일 년 동안 입는 거상<居喪>을 말한다)로 하고자 하였으나, 여러 신하들은 강복(降服 : 오복<五服>의 복제<服制>에서 규정된 복장보다 한 등급 낮춰 입는 것)하고 부장기(不杖朞 : 상례<喪禮>에서 한 해 동안 지팡이는 짚지 않고 상복만 입는 것)로 하며, 상의 동생인 능원군(綾原君)을 상주로 할 것을 힘써 청하였다.
공은 홀로 말하기를, “아버지가 사(士)인데 자식이 천자나 제후가 되었다면 그 아버지의 상을 당해서 사(士)의 예법으로 장사를 지내고 천자나 제후의 예법으로 제사를 지낸다. 지금 갖춰야 할 예는 생각건대 이것이 확실하고 틀림없는 증거가 된다.” 하였다.
얼마 안 있어 제공(諸公)의 논설이 떠들썩하여 이러쿵저러쿵 의견이 엇갈려 정론을 세우지 못하였다. 공은 또 장문의 차자를 올려 강복과 입후(立後)의 잘못을 극명하게 논하면서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승중(承重 : 장손이 아버지와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조상의 제사를 지내는 것을 말한다)하신 것이지 출계(出系 : 양자로 들어가서 그 집안의 대를 잇는 것을 말한다)하신 것이 아닙니다. 할아버지의 계통을 직접 이었는데도 인후(人後)라고 지목하고, 군주의 부모임에도 방친(傍親)처럼 대우하는 것은, 그 폐해가 장차 예제(禮制)를 훼손하고 대륜(大倫)을 없애는 데 이르게 될 것이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이어 별묘(別廟)를 세우고 스스로 제사를 주재할 것을 청하였다가 조정의 의론을 무겁게 거스르게 되어 참소를 입어 관직에서 해직되었다.
정묘년(인조 5, 1627년) 봄에 북병(北兵 : 후금<後金>의 군대)이 패강(浿江)을 건너 말을 몰아 깊이 쳐들어왔다. 조야에서 몹시 두려워하였는데 적군이 이미 평양에 이르러 우리나라에 화친을 요구하는 등서(謄書)를 보내왔다.
공은 적이 심히 강성(强盛)하므로 겸손한 말로 그 예봉을 누그러뜨리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는데 여러 공신들의 의견도 일치하여, 장신풍(張新豊)으로 하여금 서한을 써서 그러한 뜻으로 답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적들은 진군을 그만두지 않았다.
상이 강화도로 출행(出幸)하였는데, 북사(北使 : 후금<後金)의 사신)가 다시 화친을 요구하며 찾아와 상을 만나 보고자 하였다. 공이 다시 말하기를, “교전(交戰)하는 데 있어서도 사신이 있는 법이니, 사신의 말을 들어 보는 것이 옳다.” 하였다. 조정도 그 의견을 따랐다.
북병이 평산(平山)에 이르러서 화친이 비로소 결정되었다. 이에 군대가 퇴각하고 다시 동쪽으로 오지 않았다. 당시 적군이 가까이 있고 행조(行朝 : 역자주 파천<播遷> 중인 임금의 행차)의 병력은 고립되어 있고 미약한 데다 상하가 위태롭고 두려워하여 계책은 오직 화친하는 길뿐이었으나 다만 감히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적이 물러가자 또 화친의 책임을 공에게 추궁하는 여론이 일어나, 언관이 상소를 올려 공의 관직을 강등하고 유배 보내기를 청하였다. 그러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공은 벌써부터 조정에 대해 불안해하던 터라 그대로 강상(江上)에 처하였다.
가을에 원종과 인헌왕후를 장릉(章陵)으로 천장(遷葬)하면서 도성을 지나게 되자 중론(衆論)이 사친(私親)의 상(喪)이 도성을 통과해 지나가서는 안된다고 하여 백성을 동원해 길을 닦고 성 동쪽에 긴 제방을 쌓고자 하였다. 공이 홀로 불가함을 쟁론하자 대신(大臣)들도 역시 잘못을 깨닫고서 그 일을 중지하였다. 계운궁에 대해서는 이미 담제(禫祭)를 지내고 나서 합부(合祔)하려던 참이었는데, 공이 다시 별묘(別廟)를 세우고 녜(禰)라 칭하고 악장(樂章)을 제정할 것을 청하였다가 논자의 배척을 받아 경기 관찰사로 나갔다.
기사년(인조 7, 1629년)에 이르러 선후배(先後輩)의 논의가 합치되지 않아 노론과 소론으로 지목되는 일이 있었다. 승평(昇平)이 상에게 이를 일러바치면서 명류(名流) 대여섯 사람이 붕당을 꾸미고 있다고 지척하였다. 상이 진노하여 세당(世堂)의 선친과 유공(兪公) 백증(伯曾)과 나공(羅公) 만갑(萬甲)을 유배 보내고, 장공(張公) 유(維)를 나주(羅州)에서 출포(出捕 : 죄인을 관할 구역 밖으로 쫓아가서 잡는 것을 말한다)하였다.
공이 선후배가 서로 책망(責望)했던 것이지 붕당을 꾸민 것이 아님을 극력 진달하자 상이 감동하여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세 학사(學士)가 얼마 후 모두 풀려나 돌아왔고 장공도 역시 조정의 부름을 받았다. 당시 공은 군적(軍籍) 정리를 맡아 완성하였는데 이로 인해 벼슬이 올랐다.
이듬해 우참찬(右參贊)에 제수되었다. 모문룡(毛文龍)이 이미 죽은 뒤에 진계성(陳繼盛)이 대신해서 그 무리를 통솔하였는데 유흥치(劉興治)가 다시 계성을 죽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우리 조정에서는 군사를 일으켜 죄를 묻고자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가도(椵島)에 있는 군사들이 비록 굶주리고 지쳐 있기는 하나 무리가 수만 명이니, 독 안에 든 쥐도 오히려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수만 명의 무리들에 있어서이겠습니까. 필사의 마음을 먹고서 험한 지형적 조건을 믿고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지금 고립된 섬을 둥그렇게 포위하여 여러 날 지내다 보면 양식이 떨어져서 적들이 전투를 하고자 하여도 전투하기가 어렵고 전투를 그만두자면 위엄에 손상이 갈 것입니다. 그러면 동요된 무리들이 바다를 건너 달아날 것입니다. 농사철을 염두에 두지 않고 백성을 징발하여 적들과 싸우다가 죽게 하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였다. 뒤에 과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신미년(인조 9, 1631년) 봄에 상이 여러 공신들을 춘휘당(春暉堂)에 불렀는데 세자와 두 왕자도 모두 입시하였다. 상이 친히 술잔을 들어 술을 권하고 또 공이 새로 득남(得男)한 것을 축하해 주었으니 동시대 사람들이 영화롭게 여겼다.
여름에 상이 장릉(章陵 : 인조의 생부 정원군의 능)을 추숭(追崇)하고자 하였는데 조정의 의론은 불가하다고 쟁론하였다. 상이 천자에게 청원하고자 하였으나 조정에서는 그것도 불가하다고 하였다. 5월에 공에게 부제학을 특별히 제수하였는데, 아마도 상의 뜻은 공의 지론(持論)이 다른 정신(廷臣)들과 조금 다르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관철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인 듯하다.
공은 또 차자를 올려 정신(廷臣)들이 저지른 실례(失禮)를 논설한 다음 또다시 별묘(別廟)를 세울 것을 거듭 주장하여 말하기를, “예(禮)를 융숭하게 거행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예경(禮經)에 뚜렷이 밝혀 놓은 글이 없고, 일은 의(義)에 맞게 추진해야 하는 것입니다. 조정의 의론이 통일되지 않아서 주청(奏請)을 먼저 합니다마는 조정에서는 감히 승순(承順)하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예(禮)를 논의한 지가 지금 9년이 되었습니다. 그간 노사(老師)와 숙유(宿儒)가 폭 넓게 수집하고 광범위하게 인용한 사례들이 모두 오늘날 확실하고 틀림없는 증거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사(士)의 예법으로 장사를 지내고 제후(諸侯)의 예법으로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장 의거할 만한 것입니다. 신이 주장하는 바는 다만 이것일 따름입니다.” 하였다.
임신년(인조 10, 1632년)에 예조 판서 겸 예문관(藝文館) 제학(提學)에 제수되었다. 상이 하교하여 말하기를, “성인(聖人)의 효는 어버이를 높이는 것이 큰 것이 된다. 고묘(考廟 : 돌아가신 아버지의 신주)가 오랫동안 누항(陋巷)에 있어서는 안 되며 녜위(禰位 : 돌아가신 아버지가 의지할 사당 내의 자리)를 계속 비워 둘 수도 없으니 예관(禮官)들로 하여금 속히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라.” 하였다.
공이 광무제(光武帝)의 고사(故事)를 본받아 별묘(別廟)를 세울 것을 또 청하자 상이 엄하게 질책하였다. 아마도 공이 청했던 바는 별묘를 세우는 데 있었을 뿐 예를 낮추어 강복(降服)을 하거나 예를 높여 추숭(追崇)을 하는 것은 모두 공의 뜻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리하여 처음에는 조정의 의론을 거슬렀다가 종국에는 상의 질책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겨울에 이조 판서에 제수되었고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올랐으며 양관(兩館) 대제학(大提學)에 제수되었고 또 체찰부사(體察副使)를 겸하였다. 공은 전후로 이조 전랑(吏曹銓郞)의 직임을 맡았는데 붕당을 없애고 공도(公道)를 넓히며, 어진 인재를 등용하고 무능한 자를 퇴출시켰으며 인재를 가려 선발하여, 세상에서는 바야흐로 정치가 중흥(中興)을 맞이할 것이라고 일컬었으니, 집정(執政)함에 있어서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인물로 공을 으뜸으로 쳤다.
을해년(인조 13, 1635년) 봄에 이조 판서에서 해임되고 여름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 병자년(인조 14, 1636년) 봄에 병으로 인해 해면되고 여름에 병조 판서가 되었다가 또 병으로 인해 사직하였다. 가을에 한성 판윤(漢城判尹)에 제수되었다.
이해 봄에 청(淸) 나라 태종이 처음으로 ‘황제(皇帝)’라 칭하고서 사신을 보내왔다. 조정에서는 그 서한을 받아들이지 않고 다만 구어(口語)로써 거절하고자 하였다. 공은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저들이 큰 사막에서 거리낌 없이 살아와서 제제를 받은 적이 없어 방자하게 ‘황제(帝)’라고 칭하니, 누가 다시 금지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에게 반드시 ‘황제(帝)’라는 말을 하게 하고자 하니 그 의중은 혹 알기 어렵지 않지만, 만약 다만 구어로써 거절할 경우 애매모호하여 증거가 없으니, 만약 사신이 우리가 한 말을 뒤집어서 우리를 무고할 경우, 우리가 무슨 수로 천하에 스스로를 해명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한 통의 편지를 써서 저들에게 말하기를, 큰 호칭은 참칭(僭稱)해서는 안 되며, 신하로서의 절개는 바꿀 수 없는 것이라고 하고, 곧바로 오랑캐가 보내온 편지와 우리가 답한 편지를 가지고서 황조(皇朝 : 명 나라 조정)에 알려 병사와 말을 정비하여 변란에 대비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저들이 춘신(春信)으로 조제(弔祭)한다는 것은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일 뿐이다. 우리 쪽에서 사람을 고산(固山)에 들여보내 몽고 왕자의 편지를 접하여서 그 예에 대해서는 보답하고 그 어긋난 처사에 대해서는 거절하는 것이 계책으로서 합당하다. 지금은 시기가 빠르냐 늦으냐의 차이만 있을 뿐 전란이 발발한 것과 같은 상황이다. 다만 흐리멍덩하게 속임을 당하고 가벼이 저들과의 관계를 단절하여 전쟁을 촉발시켜서는 안 된다.” 하였다.
북사(北使)가 과연 서찰을 받지 않고 화를 내고는 급히 돌아갔다. 공은 반드시 전쟁이 일어날 것을 알고 상을 뵙고 말하기를, “오랑캐 사신이 급히 돌아갔으니 맹약이 풀어지고 말 것이 필연적입니다. 청컨대 일찍 강화를 하여 전쟁을 막으소서.” 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분연히 척화(斥和)를 주장하였으나 적을 대비할 대책은 없었다.
공은 홀로 이것을 깊이 걱정하여 차자를 올려 말하기를, “요사이 대간(臺諫)은 모두 척화를 주장하고 있고 묘당(廟堂)에서는 뾰족한 계책을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싸워서 지킬 계책도 결정하지 못하고 화를 완화시킬 계책도 세우지 못합니다. 이러다가 하루아침에 오랑캐 기병이 말을 달려와 생령(生靈)을 짓밟아 결딴내고 종묘사직이 파월(播越)하게 된다면 장차 그 죄는 누가 감당하겠습니까. 신은 바라건대 체신(體臣), 수신(帥臣)을 관서(關西)에 파견하여 개부(開府 : 관아를 설치하고 속관<屬官>을 두게 하는 것을 말한다)하게 하고, 여러 장수들에게 관할 구역에서 나아감은 있되 물러나는 일이 없도록 약속을 하는 한편, 서찰을 심양(瀋陽)에 보내 대의(大義)를 갖추어 진달하고 인하여 오랑캐의 정세를 살핀 다음, 만약 저들에게 다른 뜻이 없다면 우선 형제지국의 맹약을 지켜 안으로 정사(政事)를 닦아 훗날을 도모하소서. 만약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용만(龍灣)을 굳게 지켜 일전(一戰)을 할 것을 결심해야 합니다. 비록 계책이 온전하지 못하더라도 속수무책으로 망하기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지금 한결같이 머뭇거리면서 전쟁에 나가야 한다고 말씀드리려고 해도 의심과 두려움이 없지 못하며, 회유책을 말씀드리고자 하나 또한 헐뜯는 의론이 걱정스럽습니다. 강물이 얼어붙게 되면 화가 목전에 박두할 것입니다. 저들의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리는 사이 우리 쪽 군사들은 강을 건너 달아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공은 창졸간에 분쟁이 일어나고 말 것임을 알았으며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을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매번 겸손한 수사(修辭)를 사용하여 화를 늦추고 그 틈을 타서 싸워서 지킬 계책을 세우고자 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심을 받으면서까지 여러 차례 계책을 진달하였다. 말하는 자들은 강화를 주장한다는 이유로 공을 다투어 공격하였다.
이에 공은 또 말하기를, “옛날 진(晉) 나라 때 경연광(景延廣)이 거란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을 때 상유한(桑維翰)이 겸손한 말로 사죄할 것을 청하였으나 출제(出帝)가 듣지 않았습니다. 그 후에 스스로 존립할 수 없게 되자 비로소 신하로 칭할 것을 다시 청하였으나 거란이 허락하지 않아서 진 나라는 드디어 망하고 말았습니다. 주자(朱子)가 강목(綱目)에서 연광(延廣)을 폄하하였고, 호안국(胡安國) 역시 연광이 가벼이 배신하기를 좋아하여 스스로 분란의 실마리를 만들어서 그 몸을 망치고 화가 군주에게까지 미치게 하였다고 비판하였습니다. 무릇 신하된 자가 나라를 위한 계책을 세울 때 멀리 내다보지 못한다면 나라를 망치고 마는 것이니, 그 일이 비록 올바르다 하더라도 나라를 망친 죄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선조(宣祖) 때 명(明) 나라 장수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전쟁을 하는 것에 싫증을 내어 강화책을 강구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명 나라 조정에 청원을 하도록 하였는데 성혼(成渾)이 그것을 받아들일 만하다고 여겼습니다. 이정암(李廷馣)은 계속해서 그러한 의견을 진달하다가 곧 죄를 입게 되었습니다. 혼(渾)은 그의 충성을 가련히 여겨 어전에서 아뢰어 선조의 노여움을 풀려고 하였습니다. 이로부터 논자들이 혼(渾)을 지나치게 성급하다고 공격하였습니다.
이에 혼(渾)이 말하기를, ‘한탁주(韓侂冑)가 금(金) 나라를 칠 것을 주장하였을 때 선유(先儒)들은 사직을 위태롭게 했다 하여 그에게 죄를 주었다. 장남헌(張南軒) 역시 금 나라를 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이는 종묘사직을 중하게 받들고 시기를 관찰하고 역량을 헤아리는 것을 의(義)로 삼았기 때문이었을 뿐이다. 지금의 상황은 이미 진(晉) 나라 때와 같은 병력이 없고 또 저들이 조종(祖宗)의 원수도 아닌 만큼 시비와 득실을 정하기란 어렵지 않다.’ 하였습니다.
의론하는 자들은 정묘년의 강화가 진실로 해로운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지금 오랑캐가 이미 황제의 호칭을 참칭(僭稱)하여 사신이 교통하는 것도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저들이 참칭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들이 당연히 명 나라에 알려야 할 바는 아닙니다. 신은 강화(講和)를 주장했던 자로서, 감히 시비를 따질 수는 없습니다. 다만 무엇이 이롭고 무엇이 해로운지만을 말하고 시대의 의리로써 참작하고 지나간 역사를 참고할 때 강화가 필연적인 것이었음은 분명합니다.
신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약하고 오랑캐는 강합니다. 우선 정묘년의 강화조약을 준수하고 몇 년간 화(禍)를 누그러뜨린 다음 성을 쌓고 식량을 비축하여 변방의 대비를 더욱 굳게 하고 군사를 거두어 틈을 살피게 하는 외에 다른 계책이 없습니다. 조정에 드나들면서 신의 의견을 애가 타고 입이 마르도록 아뢰면서 그칠 줄을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어찌 다른 이유가 있어서이겠습니까. 종국(宗國)이 장차 위태로워질 것을 염려하여 일신(一身)의 이해 따위는 따져 볼 겨를이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그러자 여론이 또 떠들썩하게 공을 공격하였다.
11월에 이조 판서에 다시 제수되었다. 12월에 청나라 태종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우리나라를 공격해 왔다. 선봉을 가벼운 기병으로 배치하여 급히 말을 달리게 해 며칠 만에 서쪽 교외에까지 이르렀다. 14일에 상이 강화도로 몽진(蒙塵)을 떠나 남문(南門)에 도착했을 때 적의 기병이 강화로 가는 길을 막아버렸다. 상은 어가(御駕)를 성루(城樓)에 멈추게 하고 여러 신하를 불러 계책을 물었는데 사태가 매우 급박하여 상하가 얼굴빛을 잃고서 어디로 가야 할지를 알지 못하였다.
이때 공이 나아와 아뢰기를, “일이 숨 한 번 쉬고 내뱉는 사이에 달려 있어 조금이라도 지체해서는 안 됩니다. 신이 혼자 말을 타고 나가 그들을 맞이하여 맹약을 어긴 책임을 묻겠습니다. 저들의 뜻이 만약 화친하는 데 있지 않다면 그 흉포함을 드러내어 신을 단칼에 베어 버릴 것입니다. 만약 신을 거부하지 않는다면, 주객(主客)이 서로 만나고 왕복하면서 난처한 질문을 하고 답변하느라 주저하는 사이 시간을 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서울과 가까우면서 수비할 만한 곳으로 남한산성(南漢山城)만 한 곳이 없습니다. 청컨대 그 틈을 타서 어가를 돌려 성안으로 달려 들어가 사태를 지켜보도록 하소서.”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계책이 괜찮다. 경이 홀로 목숨을 버리고 호랑이 굴속으로 들어가 군주의 위급함을 구해 주고자 하니 옛사람도 하기 어려운 일이다.” 하고 한탄하고 탄식하며 공을 적진에 보내기로 하였다.
공은 또 이경직(李景稷)이 강개(慷慨)하고 기상과 절개가 있다고 하고 그와 함께 갈 것을 청하였다. 하직 인사를 하고 나서 금병(禁兵) 20기(騎)를 뽑아 뒤따라오도록 하였으나 성을 나오자마자 좇아오던 기병이 모두 흩어지고 말았다.
공은 홀로, 이공(李公) 및 한 사람의 군교(軍校)와 더불어 급히 말을 달려 사령(沙嶺)에 도착하여 적기(敵騎)를 만났다. 말을 세우고 그들과 더불어 말을 하였는데, 맹약을 저버리고 군사를 일으킨 까닭을 힐문하였다. 적장(敵將)은 조속히 화친을 맺기만을 청하였다. 공은 그리하여 그와 더불어 오랫동안 말을 주고받으며 되풀이하는 사이 날이 저물었다. 이 사이에 상은 동쪽으로 수구문(水溝門)을 나가 남한산성으로 달려 들어갈 수가 있었다.
공은 적기(敵騎)와 함께 행군하며 도성(都城)에 들어갔는데, 적과 더불어 말한 것이 행조(行朝)에 알려지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다음 날 저녁까지 아무런 소식이 없자 적인(敵人)이 크게 노하여 공이 자기를 기만했다고 하며 공을 해치려고 하였다. 그때 옆에 있던 사람이 옳지 않다고 하면서 화친(和親)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데 서둘러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적군이 남한산성에 진군하여 공들을 돌려보냈다. 상이 공의 손을 잡고 노고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만약 조정의 신하들이 모두 경처럼 충성스러웠다면 어찌 오늘과 같은 일이 있겠는가.” 하고는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때 성안에 있는 병사가 만 명이 채 못 되어 성첩(城堞)을 분담하여 수비하는 것도 어려운 지경이었다. 그런데 적기(敵騎)가 대거 몰려와서 산과 들을 덮고 겹겹으로 성을 포위하여 가까이에서 튀어나오며 사방에서 위협을 해 대니 상하가 위태롭고 두려워하여 조석을 보전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적은 날마다 사람을 보내와 화친을 모색하며 말하기를, “화친이 이루어지면 군사를 즉시 철군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자 여러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강화론을 공격하는 의견이 더욱 엄하고 매서워졌으며 대신(大臣)들은 화친을 맺지 말 것을 고집하였다.
공이 홀로 개연히 말하기를, “오늘의 계책은 화친을 하는 것과 전쟁을 하는 것뿐인데 전쟁을 하고자 하나 병력이 약하며, 화친을 말하는 것은 꺼리고 있다. 하루아침에 성이 함락된다면 상하가 어육(魚肉)이 될 것이니 종묘사직은 장차 어디에 두어야 한단 말인가.” 하였다.
성을 포위한 지 40여 일이 되었을 때 성은 거의 무너진 데가 여러 군데가 되었으며, 원군(援軍)은 끊어지고 양식은 떨어지고 땔감마저도 다 떨어진 데다 적이 포탄을 날려 부수어서 성첩이 온전한 곳이 없고 인심도 무너지고 이반되어 화친을 맺기를 원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에 강화를 체결하는 문서가 비로소 완성되었는데 김공(金公) 상헌(尙憲)이 조정에서 통곡하며 손으로 그 문서를 찢어버렸다. 공이 찢어진 문서를 주워서 다시 붙이며 말하기를, “문서를 찢는 자가 없어서는 안 되고, 문서를 다시 붙이는 자도 역시 있어야 마땅하다.”라고 하였다. 제공(諸公)이 모두 청성(靑城)의 욕을 면치 못할까 우려하였다. 공이 홀로 말하기를, “오랑캐는 우리나라의 땅을 탐내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뜻은 화친을 하여 다른 근심이 없기를 보장받는 데 있다.” 하였다.
강화도가 함락되어 패배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적은 또 포로로 잡은 숫자를 과장하며 성이 떠나가도록 떠들어 대고 놀라게 하였다. 이에 성 아래에서 맹약이 이루어지게 되었으니 실로 정축년(인조 15, 1637년) 정월 그믐의 일이었다. 적의 군대가 퇴각하고 상이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왔다.
4월에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난리 뒤에 처리해야 할 일이 넘쳐나서 모든 일이 엉성하게 처리되고 있었다. 공은 조정에 나아가서는 군주의 마음을 위로하고 면려하는 한편 물러나서는 조정의 정사(政事)를 이리저리 미봉(彌縫)하여 안팎으로 조금이나마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상은 남한산성에서 내려온 후부터 늘 마음이 불쾌하고 답답하여 조정에 나와서도 기쁜 빛이 없었다. 공이 간(諫)하기를, “상이 뜻을 두는 것이 모든 일의 근본입니다. 기(氣)는 뜻을 돕기 위해 행하는 것이니 그 지기(志氣)를 길러 흔들리지 않고 꺾이지 않게 된 연후에야 공(功)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하나가 뜻대로 되지 않았다고 하여 축 처져서 뜻과 기운을 잃어버린다면 천하의 일은 할 게 없습니다. 흥함과 쇠함이 뒤집히지 않는다면 다시 무엇을 바라볼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또 말하기를, “여름에 하나의 성취가 있을 것입니다. 혼란이 점점 잦아들어 소강 상태를 이룰 것입니다. 월(越) 나라는 회계(會稽) 땅에 머물러 있었는데도 구천(句踐)이 패자(覇者)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국가와 영토를 조금도 잃지 않았고, 조종(祖宗)의 음덕(陰德)과 은택(恩澤)이 쇠하지 않았으며, 호령을 하면 사방에 막힘이 없고, 재력(財力)은 삼남(三南)에 아직도 여유가 있으니, 오직 전하께서 뜻을 어떻게 세우느냐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진실로 올바른 정치를 하고자 하신다면, 어찌하여 구제하지 못함을 걱정하십니까.” 하였다.
공이 고심을 하면서 성상을 조섭하고 보좌함에 그 말이 이와 같았다. 또 관청의 일을 회복하고 관제(官制)를 개혁하고, 이조 낭청의 추천권을 없앨 것을 청하였다. 대간(臺諫)들은 잘못된 규정을 조금 바로잡아 혼란을 다스려서 치욕을 설욕하려는 의도라고 여겨 피혐하였고 아래 공경(公卿)들의 의견도 제각각이어서 결국 시행되지 못하였다.
공은 또 제도(諸道)에 명을 내려 난리 통에 죽은 장사(將士)와 충신, 열녀를 기록하여 진달하게 하고 즉시 정려(旌閭)를 세워 포창(襃彰)하게 하는 한편 전쟁터에 흩어진 유골을 사람들을 모아 수습하게 하고 관에서 제사를 베풀어 주도록 하였다. 또 포로로 붙잡혀 간 사람들을 속환(贖還)해 오게 하되 그 값을 대체로 정하여 한도를 넘지 못하도록 하였으며, 길거리에 떠돌아다니는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곡식을 주어 구제하도록 하였으니, 이리하여, 제 살던 곳으로 돌아간 자들이 매우 많았다.
가을에 좌의정이 되었다. 난리 뒤에 소들이 병에 걸려 많이 죽었다. 농민이 소가 병에 걸렸음을 고해 옴에, 공은 화가 군대에까지 번질 것을 염려하여 도살을 엄하게 금지하고, 호미와 괭이를 더 많이 주조하여 빈민에게 지급하여 경작하도록 하였다.
남한산성에서 나오던 날 약조한 내용에는 청나라가 중국을 칠 때 우리나라 군대를 부른다는 조항이 있었다. 그런데 이해 가을 마침내 징병을 요구해 왔다. 이연양(李延陽)이 상에게 공을 파견하여 출병을 사양하도록 청하였다. 이에 공이 심양(瀋陽)으로 가서 우리나라가 명 나라를 섬긴 지가 3백년인데 병사를 일으켜서 공격을 돕는 것은 의리상 불가하다고 반복하여 쟁론하여 청나라 사람이 그 뜻을 빼앗지 못하였다. 그때 포로로 잡혀 간 사람을 속환하여 수천 명이 돌아오게 되었다.
무인년(인조 16, 1638년) 가을에 영의정에 나아갔다. 북인(北人 : 청나라 군대)이 다시 중국(명나라)을 침략하면서 우리나라 병사를 징발하였다. 공은 남한산성 아래에서의 맹세는 형세가 궁하고 힘이 모자라 계책이 부득이한 데서 나왔던 것으로, 오늘날 명 나라를 침공하는 데 군사를 원조하는 것은 의리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하여 좇으려 하지 않았다. 이에 청 나라 사람이 크게 노하였다. 힐책하는 말이 날마다 이르자 온 조정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공이 상에게 아뢰기를, “우리나라의 한두 대신(大臣)이 이 일 때문에 죽게 된다면 비로소 천하 후세에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물며 이 몸이 실제로 그 일을 주관하고 있으니 제가 가서 일을 감당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다시 심양으로 갔다. 심양에 도착하니 여러 귀인(貴人)들이 당(堂)에 줄지어 앉아 있었다. 저들이 공을 붙잡아 들이고서는 힐문하기를 “조정에서 누가 출병을 저지하는가?” 하였다. 공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영의정이 니 알지 못하는 일이 없다. 출병을 저지하는 일이 나에게서 나왔으니 감히 죽음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겠다.” 하였다. 청 나라 태종이 의롭게 여겨 석방하였다. 결국 공이 영의정의 자리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출병하지 않았다.
처음 공이 심양에 갈 때 사람들은 모두 공이 반드시 죽게 될 것이라고 여겼다. 공도 역시 죽음을 면할 수 없음을 스스로 헤아리고 상례 도구를 함께 딸려서 갔다. 친척 자제들이 모두 통곡하며 길에서 전송하였는데 공은 그래도 태연하였다.
기묘년(인조 17, 1639년)에 상이 병으로 자리에 누운 지가 오래되었는데 궁중에서 무술(巫術)로 저주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피의자가 공초(供招)에서 진술한 말이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안과 관련이 있었다. 상이 밀지(密旨)를 내려 공으로 하여금 그 옥사를 끝까지 캐내도록 하였다. 그러나 공이 불가하다고 주장하며 사건을 축소시킬 것을 힘껏 간쟁하였다. 상이 한층 더 노하여 공을 심양(瀋陽)에 사신으로 머물러 있게 하고 공의 죄를 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삼사(三司)를 문책하였다.
공이 심양으로 가는 도중에 봉장(封章 : 상소를 올리는 것을 말한다)하여 직임에서 내칠 것을 청하면서 말하기를, “신이 공주에 대해 차마 죄를 들추어내지 못하였던 것은 감히 선왕(先王)을 저버릴 수 없어서였으며 감히 전하를 저버릴 수 없어서였습니다. 가령 신이 상께서 보살펴 주심만을 생각하고 큰 옥사를 가벼이 일으켰다면, 이는 참으로 믿기 어려운 신하이니 전하께서 이런 사람을 어디에 쓰시겠습니까.” 하였다. 또 강충(江充)과 이필(李泌)의 일에 대해서도 반복하여 아뢰었다. 그리하여 이 옥사의 여파가 결국 용만(龍灣)에까지는 이르지 못하게 되었다. 미워함을 너무 심하게 하는 것은 행할 수 없는 일이라 조정에서는 심부름꾼 역할을 한 졸개(副价)가 치명(致命)하는 것 정도만 허락하였다.
경진년(인조 18, 1640년) 봄에 해직을 청한 것이 받아들여져서 2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는데 또 일에 연루되어 쫓겨났다. 임오년(인조 20, 1642년) 가을에 다시 재상에 제수되었다. 여러 차례 해면해 줄 것을 바랐으나 상이 두터이 면려(勉勵)하기를 그치지 않아 나가서 시사(時事)를 보살폈다. 10월에 또 심양에 갔다.
정축년(1637년)에 강화의 전말을 갖추어 진도독(陳都督) 홍범(弘範)에게 자문(咨文 : 조선 시대 중국과 주고받던 외교문서)을 보냈는데, 황조(皇朝)에 알려지기를 바라서였다. 그러나 바닷길이 험하고 멀어서 왕래가 단절되어 자문이 반드시 도착했는지 여부를 알 수 없었다. 그리하여 명나라에 갈 수 있는 자로서 반드시 돌아와서 보고할 수 있는 자를 구하고자 하였는데 때마침 서쪽 변방에서 독보(獨步)라는 승려 하나를 얻었다. 이자는 오랫동안 향산(香山)에서 살다가 가도(椵島)에 들어갔다가 난리가 나자 돌아오지 못하고 중국으로 굴러들어가서 홍승주(洪承疇)의 군중(軍中)에 머물던 자였다.
무인년(1638년) 가을에 승주(承疇)가 독보(獨步)를 파견하여 우리나라의 사정을 염탐하고 돌아오게 하였는데 강변을 순찰하던 병졸에게 사로잡히게 되었다. 이에 서수(西帥) 임경업(林慶業)이 독보(獨步)를 서울로 보냈다. 공이 그와 더불어 이야기를 나눈 다음, 이 일을 맡길 만하다고 하고 상에게 아뢰었다. 그리하여 주문(奏文)을 갖추고 군문(軍門)에 보낼 자문(咨文)을 갖추어 독보(獨步)를 바닷길을 건너 다시 중국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신사년(인조 19, 1641년) 가을에 중국이 우리나라 포로를 송환할 때 독보(獨步)도 회답 자문을 얻어 그들과 함께 돌아왔다. 회답 자문의 내용은 대략, “귀국(貴國)의 괴로운 실정은 하늘과 사람이 함께 비추어 보고 있는 바입니다. 귀국은 대대로 정순(貞順)한 정사를 펼쳐 왔으니 그 노고가 헛되이 없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비록 잠깐 동안 급박한 때가 있었고 궁지에 몰린 적도 있지만 어찌 다시 그러한 일을 견뎌낼 수 있겠습니까. 안심하고 협력하여 처음에는 잃었으나 나중에는 보상을 받는 본보기로 삼도록 합시다.”라는 것이었다.
당시 공은 관직에 있지 않을 때였다. 신평성(申平城)이 재상으로 있었는데 공에게 재차 자문(咨文)을 지어 줄 것을 청하여 독보(獨步)를 다시 파견하였다. 청 나라 사람이 그것을 탐지하고서 노하여 우리나라에 사신을 보내 힐문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만금을 내놓았으나 문제가 끝나지 않았다. 홍승주(洪承疇)의 군대가 패하여 항복하게 되자 독보에 관한 일을 갖추어 말하면서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 하였다.
마침 이계(李烓)가 잠상(潛商 : 밀무역)을 한 일이 발각이 났다. 청나라 사람이 세자를 결박하고 계(烓)를 봉황성(鳳凰城)으로 끌고 갔다. 계(烓)가 나라의 기밀을 말하고서 살아나기를 바라서, 마침내 독보(獨步)의 일을 고해 바쳤다. 이에 청나라 사람이 우리나라 대신이 직접 와서 치대(置對)할 것을 요구하였다. 사태는 바야흐로 예측 불허였다.
대책을 의논하던 사람 중에서는 혹, 일이 아무런 증거가 없으니 감추는 것이 낫다고 하는 자도 있었다. 공은 말하기를, “저들은 중국 선박이 왕래하는 것을 알고 있다. 지금 실상대로 말하지 않으면 의심이 더욱 커질 것이다. 결국에 가서 종적이 탄로 나면 화(禍)가 반드시 중해질 것이니 실상대로 말하는 것이 낫다. 나와 경업(慶業)이 죽으면 화가 그치게 될 것이다.” 하였다.
상은 공이 연루된 까닭에 머뭇거리면서 차마 결단을 내리지 못하였다. 마침내 행차가 용만(龍灣)에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공에게 말하기를, “전후로 승려를 보냈던 계책은 모두 경업(慶業)에게서 나왔으니 그는 결국 죽음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모든 책임을 그에게 미루면 공은 가히 화를 당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니 이는 그를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애초에 천하에 명분과 의리를 세우고자 해놓고서 죽음에 직면해서 그 일을 남에게 맡기고서 자기는 모면하고자 해서야 되겠는가.” 하였다. 제공(諸公)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충신 열사는 참으로 이와 같지 않아서는 아니 되는 것인가.” 하였다.
당시 경업도 또한 붙잡힌 몸이 되어 망명길에 올랐다. 공이 봉성(鳳城)에 도착했을 때 청 나라 사람들은 군대의 위용을 성대히 갖추어 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공을 마당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누가 승려를 파견하는 일을 주동하였는지를 심문하였다. 공은 말하기를, “내가 실제로 그 일을 주동하였다. 임경업은 그를 분장시켜 보내는 일만을 하였으니 왕명으로 한 것도 아니며 또한 여러 사람과 모의하여 한 것도 아니다.” 하였다.
이에 그 답변으로 인하여 심양(瀋陽)까지 가게 되었다. 청나라 태종은 공을 형틀에 묶어 북관(北館)으로 보내 가두게 하였다. 북관에 갇힌다는 것은 옥에서 죽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계미년(인조 21, 1643년)에 비로소 남관(南館)으로 이송되었다. 당시 김공(金公) 상헌(尙憲)과 이공(李公) 경여(敬輿)도 같은 장소에 함께 구금되어 있었다. 화인(華人) 가운데 포로를 감독하는 사람이 한탄하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동방의 경상(卿相)으로 이곳에 잡혀 와 있는 이들 세 사람이야말로 의(義)를 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이다.” 하였다. 공은 유폐된 지 4년 동안 위험과 치욕이 함께 닥쳐와도 항상 주역 읽기를 그만두지 않았다.
갑신년(인조 22, 1644년)에 청 나라 사람이 연경(燕京)으로 들어가 명 나라를 몰아내고 나라의 경계를 대략 정하였다. 을유년(인조 23, 1645년)에 우리나라의 세자와 두 왕자를 비로소 돌려보냈다. 이때 공과 제공(諸公)도 함께 돌아왔다. 가을에 진천(鎭川)에 머물러 살면서 와룡계(臥龍溪) 옆에다가 띳집을 엮었다. 겨울에 도성으로 들어오라는 부름을 받았다.
병술년(인조 24, 1646년)에 폐빈(廢嬪 :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빈) 강씨(姜氏)에게 사약을 내렸다. 공은 은혜를 온전히 해 줄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받지 못하였다. 이해 가을에 공의 병이 심해져서 어의(御醫)가 와서 보고 임금이 드시는 반찬을 나누어 주었다. 이미 병이 심하자 문안하는 행렬이 이어졌다. 마침내 정해년(인조 25, 1647년) 5월 17일 집에서 숨을 거두었다.
상은 공을 위하여 닷새 동안 고기를 드시지 않고 사흘 동안 조회를 보지 않았다. 중사(中使 : 왕의 명을 전하는 내시)가 상례를 살폈으며 관(官)에서 염빈(殮殯)을 도와주었다. 대내에서 수의(壽衣)와 이불을 하사하고 3년 치의 녹봉을 주었으니, 전례에 의거해 애휼(哀恤)하는 정을 나타낸 것이다. 그 뒤에 상이 조회를 보면서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임금에게 충성하는 것이 최완성(崔完城)과 같은 사람을 어찌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해 8월에 청주(淸州)의 치북(治北) 대율리(大栗里)의 산 언덕에 장사 지냈다. 전(前) 부인(夫人) 인동 장씨(仁同張氏)는 우찬성(右贊成) 만(晩)의 따님이다. 후(後) 부인 양천 허씨(陽川許氏)는 종묘 영(宗廟令) 린(嶙)의 따님인데 함께 부장(附葬)하였다.
초취(初娶) 장부인(張夫人)은 자식이 없어서 공은 조카인 후량(後亮)을 후사로 삼았다. 재취(再娶) 허부인(許夫人)은 아들을 낳았으니 후상(後尙)이다. 당시 사대부들은 양자를 세운 다음에 친자식을 낳게 되면 친자식으로 하여금 제사를 주관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세월이 흐르면서 풍속이 되었다. 공은, 부자(父子)가 일단 정해지면 천륜(天倫)에 순서가 있게 되어 바꿀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리하여 후량(後亮)이 제사를 주관할 수 있게 해 줄 것을 조정에 청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것을 법령으로 삼게 되었다.
후량은 한성 좌윤(漢城左尹)으로 관직을 마쳤는데 완릉군(完陵君)에 습봉(襲封)되었다. 후상(後尙)은 관직이 응교(應敎)에 그쳤다. 측출(側出)인 딸은 첨지 구광(具鑛)에게 시집갔다. 좌윤인 후량의 장남은 석진(錫晉)인데 현령(縣令)이며 차남 석정(錫鼎)은 영의정이며, 삼남 석항(錫恒)은 감사(監司)이다. 딸들은 진사 윤제명(尹濟明)과 정랑(正郞) 신곡(申轂)에게 각각 시집갔다. 응교인 후상이 석정을 후사로 삼았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영특하고 과감하였으며 신중함과 멀리 내다보는 식견이 있었다. 커다란 논의들을 처리하고 큰 어려움을 감당함에 있어 생각과 얼굴빛이 차분하고 안정되었으며 용감하고 곧게 똑바로 처신하였다. 일찍이 이랬다저랬다 하는 법이 없었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중론을 막아냈다. 바라보면 몸이 옷도 가누지 못할 것 같으나 만나 보면 소리는 금석(金石)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가 하늘로부터 얻은 자질이 대개 이와 같았다.
소싯적에 백사(白沙)와 현헌(玄軒)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두 공께서 모두 자세히 살피고서 미루어 인정하였다. 조공(趙公) 익(翼), 장공(張公) 유(維), 이공(李公) 시백(時白)과 일찍부터 사귐을 맺고 부지런히 공부하고 익히고 다듬기를 노년에 이를 때까지 변치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사우학사대부(四友學士大夫)’라 칭하며 찬미하였다.
마음속에 품은 회포는 평탄하고 온화하였으며 격식에 얽매이지 않았고 허물을 고치는 데 용감하였으며 선을 좇는 데 즐거워하였다. 남들이 그의 잘못을 바로잡아 주면 성심으로 마음을 열고 받아들였으며 기쁜 모습이 얼굴에 나타났다.
중흥(中興)의 시대를 만남에 미쳐서는 성군(聖君)이 위에 계시고 어진 선비가 조정에 가득하였다. 공은 원훈(元勳)으로서 요직을 많아 정사를 다스렸는데 매번 여러 인재들의 화합을 이끌어내고 서정(庶政)을 개혁함으로써 국세(國勢)를 공고하게 하여 외적의 침략을 물리치 고자 하였다. 그가 구상하고 계획했던 바는 그가 올린 장주(章奏)에 보이는데 정밀하고 확실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앞서는 예론(禮論)으로 말미암고 뒤에서는 화의론(和議論)을 주장한 것이 둥근 구멍에 모난 자루가 맞지 않듯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끝내 크게 그 뜻을 펼쳐보지 못하였으니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별묘(別廟)를 세우자는 설은 변례(變禮)를 절충한 것으로서 경사(經史)에도 근거가 있으며, 녜조(禰祖)를 잘못 대우한 것을 분명히 밝히는 것이었다. 화의론에 이르러서는 시대의 의리를 깊이 헤아려 처음부터 강한 적에게 무모하게 도전하여 스스로 전복되는 것을 자초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작은 절개를 지키려고 차마 종묘사직을 저버릴 수는 없다고 생각하였으니, 이는 명나라의 가정(嘉靖) 연간이나 송나라의 정강(靖康)의 난과는 견주어 논할 수 없는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 중에는 혹 겉에 드러난 명분과 속에 있는 실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마음을 굽히고 남들을 따라서 주창하여, 공과 같은 입장에 있으면서도 공을 기롱하는 축에 서고 마는 자가 있으니, 또한 어긋난 일이 아니겠는가. 일에 임하여서는 잘 판단하고 시비를 갈라 분석하기를 마치 손가락을 가리키는 것 같이 쉽고 분명하게 하여 중론(衆論)이 중구난방으로 떠들어 대도 탁연히 자신의 입장을 지켜 흔들리지 않았다.
어전에 나아가 시사(時事)를 논할 때마다 확고하게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는데 상이 혹 노기 띤 음성을 낼라치면 공이 문득 다시 변론하되 반드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끝까지 진달하였다.
하루는 연양(延陽)이 어전에 나아갔다가 공이 반복하여 굳게 쟁론하여 허락을 받은 다음에야 그만두는 모습을 보았다. 연양이 바깥으로 나와서 공에게 말하기를, “작은 일에 어찌 그리 힘써 쟁론하십니까.” 하였다. 공이 대답하기를, “일에는 큰 일 작은 일을 막론하고 모두 옳고 그름이 있는 법이다. 어찌 작은 일이라 하여 구차하게 임금의 뜻을 따르겠는가.” 하였다. 연양이 탄복한 다음 일찍이 말하기를, “대신(大臣)으로서 상 앞에서 시비를 다투는 자는 오직 공뿐이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완성(完城)의 사업은 큰 것이 여덟 가지가 있으니, 첫째, 반정(反正)을 하여 위태로운 나라를 바로잡은 것이요, 둘째, 예(禮)를 논의하여 부자(父子)의 윤리를 밝힌 것이요, 셋째, 단기(單騎)로 적에게 달려가 위기를 넘긴 것이요, 넷째, 비방을 무릅쓰고 강화를 주장하여 종묘사직을 보존한 것이요, 다섯째, 힘을 다해 징병을 거절하여 죽는 것을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긴 것이요, 여섯째, 천조(天朝)에 사신을 보낸 것에 대해 혼자서 책임을 떠맡아 감당해 낸 것이요, 일곱째, 인골(人骨)과 시신(屍身)을 잘 수습한 것이요, 여덟째, 붕당(朋黨)을 지어 자기 편을 두둔하는 일을 하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연양은 공을 가장 깊이 알았던 까닭에 그 말이 이와 같았다.
장계곡(張谿谷)은 매번 공을 칭하여 말하기를, “거짓 없는 참된 마음으로 순국하였으며 죽음을 피하지 않았다. 자겸(子謙)이야말로 참다운 사직신(社稷臣)이다.” 하였다.
이공(李公) 경여(敬輿)는 말하기를, “굴자(屈子 : 굴원<屈原))의 충성은 충성스러움이 지나친 것이었는데 지천(遲川)의 충성 역시 충성에 지나친 것이었다.” 하였다.
세당(世堂)이 그윽히 공을 관찰해 보건대, 공은 경전을 정밀히 연구하였고 전훈(典訓)에 밝고 통달하였으며, 사서(四書)를 윤독(輪讀)하여 터득한 것이 깊었던 까닭에, 그것이 사업에 나타나고 논의에 드러난 것이, 모두 이것에 근본을 두고 있다. 천박한 학문과 얕은 식견으로는 실로 그 한두 가지라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니, 공에 대한 비방이 분연하여 벌떼처럼 일어나 번져서, 대번에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아아, 말류(末流)는 흐리디흐리고 세월은 흘러가면 돌아오지 않으니 그 근원을 크게 어지럽힘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른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비록 그렇다고는 하나, 공에게 있어서는 무슨 손상이 되겠는가. 요컨대, 백세 뒤에라도 질정(質正)할 수 있을 따름이다.
공의 문장은 이취(理趣)를 위주로 하였다. 주의(奏議)의 문장에 이르러서는 세상에서는 모두 붓끝에 혀가 있는 것 같이 생각하였다. 공이 지은 시문(詩文)이 19권이고 경서(經書)의 의문을 기록한 것으로 약간의 책이 있다.
세당(世堂)은 일찍이 공의 유집(遺集) 서문을 썼다. 이제 상국(相國)이 또 묘에 새길 명(銘)을 써 줄 것을 요구하니, 감히 사양할 수 없었다. 삼가 지장(誌狀)에 의거하여 사실과 행적을 순서에 따라 기록하고 명(銘)을 다음과 같이 붙인다.

하늘에서 영명한 선비를 내어
일세를 다스리게 하였도다
대들보이자 노로서
집을 지탱하고 물을 건넜도다
사심이 없었으니
우리의 의지처였도다
여기 문충공
그 공(功)이 크니
성명(聖明)을 보좌하여
음습한 악기(惡氣)를 없앴도다
건곤(乾坤)이 태평하고
일월(日月)이 개도다
장릉(章陵)의 복의(服議)에
군유(群儒)가 많이들 가렸거늘
모피로 번벽(藩壁)을 덮었도다
밖으로 자물쇠를 채우고
안은 닫았도다
존친(尊親)이 정해지지 않아
대의(大義)가 장차 어두워지려 하였는데
공이 홀로 주장하여
의심을 깨고 막힌 것을 뚫었네
하늘이 인륜의 순서를 정하여
우리가 밝게 게양하기를 기다리노니
대운(大運)은 항구하지 않아
의상이 바뀌어 변했도다
우리 동토(東土)를 불쌍히 여기사
먼저 해독(害毒)을 접하게 하였으니
하늘을 덮을 정도로 세가 강해
예봉(銳鋒)이 땅을 휩쓸었도다
몸은 호랑이 먹이가 되면서도
사직을 보위하여
고립된 성에서 구원이 끊어지고
강화도마저 또 무너졌으니
서로를 돌아보매
크고 작은 것이 다 무너졌도다
일찍이 한 사람도
멀리 내다보고 깊이 생각하지 않았으나
충성을 다하고 힘을 다해
안팎으로 분주하였으니
공이 아니면
누가 무너지는 것을 구제했으리요
사방의 경계가 예와 같고
칠묘(七廟)에 제사 지내니
우리 가방(家邦)을 보존하여
만대까지 이어지리
북인(北人)이 내려와서
협박하고 을러댔으나
의(義)를 지킬 것을 마음에 맹서하고
죽음을 달게 여겼나니
북관(北館)에 유폐되어
여러 해 동안 갇혀 있었도다
적도 삼가고 공경하여
큰 어려움이 갑자기 풀렸나니
아아, 공의 공렬(功烈)은
예전에도 짝할 바가 없나니
내가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써
공의 자취를 드러내고
바위에다 새겼으니
길이길이 전해질지어다

숭정대부 행 이조판서 겸 홍문과 대제학 박세당(朴世堂)이 짓고
손자 대광보국 숭록대부 원임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춘추관 관상감 세자사 석정(錫鼎)이 삼가 전서(篆書)를 쓰고
증손자 중훈대부 행 홍문관 교리 지제교 겸 경연시독관 춘추관 기주관 세자 시학 중학교수 창대(昌大)가 쓰다.
                                   
 
 


 

 

 

 

 

 

 

 

 

북이면 대율리에 있는 최명길 신도비이다

 따스한 햇살아래 망초꽃이불 덥고서 고즈넉히 산새소리에 오수를 즐긴다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묘앞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중기의 문신인 최명길(1586∼1647) 선생의 공적을 기리고 있다.

최명길은 선조 38년(1605) 문과에 급제한 후 승문원을 거쳐 예문관 전적이 되었다. 그러던 중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유폐하고 정치가 날로 어려워지자 인조를 추대하는 인조반정에 가담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에는 청나라를 배척하는 당대 여론에 맞서 현실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였다. 청의 군대가 물러간 뒤 우의정이 되어 왕을 위로하고 흩어진 정사를 잘 정리하여 국내외가 안정되도록 하였고, 이 후 좌의정을 거쳐 영의정에 이르렀다.

비는 숙종 28년(1702)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박세당이 짓고 최창대가 글씨를 썼으며, 1980년 비의 보호를 위해 비각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