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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동 열녀김해월묘지(牛岩洞 㤠女金海月墓地) 본문
청주시 삼일공원을 지나 청주우암산순환도로를 걷다보면 우측으로 비석거리라는 지명에 맞게 비석이 서있는 곳을 만날수 있다. 비석거리 앞으로는 수암골 내려가는 길이 있으며 청주시내를 조망할수 있는 관망대도 만들어 놓았다. 해월의 묘소는 비석거리의 비석뒤로 산언덕을 10여미터 오르면 만날수 있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표충사의 원경이다. 표충사는 이인좌가 난을 일으켜 청주읍성으로 쳐들어갔을 때 반란군에 의해 죽은 충청병사 이봉상과 비장(裨將) 홍림, 영장(營將) 남연년의 넋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사당입니다. 충청병사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의 현손(玄孫)이다. 원래는 삼충사라고 했다가, 1736년에 표충사로 사액받았다. 당시 영장이였던 남연년의 충신각은 원남면 하노리에 있다.
[원남면 하노리에 있는 남연년의 충신문이다]
해월과 관련된 인물로서 홍림을 빼놓을수 없다.홍림(洪霖)은 조선 후기 이인좌(李麟佐)의 난(무신란) 때 충청병영의 무신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초명은 진(震), 자는 춘경(春卿)이다. 첨절제사 홍수명(洪受命)의 아들이다. 충청병마절도사 이봉상(李鳳祥)[1676~1728]에 의하여 청백함이 인정되어 1727년(영조 3) 막료가 되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1728년 청주읍성이 함락되고 이봉상이 잡힌 다음 죽음을 당하자, 그는 자신이 절도사라하며 반란군을 꾸짖었다. 반란군은 그를 충신이라 칭찬하고 후일 자손들을 녹용(錄用)하겠다고 하자, “나는 아들도 없거니와 있다 하여도 너희 같은 역적 놈의 부하로 쓰이게 할 수는 없다.”하고 죽었다.
조현명(趙顯命)의 주청으로 1729년 6월 청주기(淸州妓:海月)가 낳은 그의 아들이 면천(免賤)되고 7월에 예조의 계(啓)에 따라 호조참판에 증직되고, 정려되었다. 검토관 이성중(李成中)이 청주를 지나다가 그곳 사람들이 홍림의 충의에 대하여 칭찬하는 것을 듣고 1742년 왕에게 아뢰어 그의 처에게 늠료(廩料)가 하사되었으며, 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각종 특혜를 베풀어 그 충절을 기렸다. 표충사(表忠祠)에 배향되었다.
[표충사 경내에 모셔진 홍림의 위패이다]
청주디지털문화대전에는 해월은 원래 홍림의 첩이였다.이인좌의 난 때 홍림이 희생되자 반란군에게 애원하여 그의 시신을 찾아 장사를 지냈다. 원래 홍림과 함께 죽을 마음이 있었으나 뱃속에 유복자가 있었기에 죽지 않았는데, 유복자가 7세가 되었을 때 요절하자 아들과 함께 죽었다.라고 적혀있는데
그러나 조선왕조살록 영조실록23년 11월28일자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임금이 대신(大臣)과 비국 당상을 인견(引見)하였다. 영의정 김재로(金在魯)가 말하기를,
"거창(居昌)의 순절(殉節)한 사람 이술원(李述原)은 무신년 의 적변(賊變)을 당하여 좌수(座首)로서 적을 꾸짖으며 사기(辭氣)를 굽히지 않고 늠연(凛然)하였습니다. 끝내 그 눈과 코가 잘려서 죽었으니 옛날 안고경(顔杲卿) 에게 부끄럽지 않습니다. 조가(朝家)에서 증직(贈職)·정려(旌閭)하고 사당을 세워 숭포(崇褒)함이 지극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다만 추증한 관직이 낮으니, 청컨대 2품(品)을 증직하여 충절(忠節)을 포상하고 풍성(風聲)을 세우는 방도로 삼으소서. 한편 그의 아들 이우방(李遇芳)은 변을 당한 뒤에 미친 듯 부르짖으며 통곡하고 곧장 관군(官軍)으로 달려가 선봉(先鋒)이 되어 적괴(賊魁)를 잡고는 손으로 스스로 시체를 잘라서 그 간을 씹고 아비의 빈소에 고(告)하고는 예를 갖추어 염관(斂棺)하였으니, 그 효성이 숭상할 만합니다. 조가로부터 관직에 제수되어 직장(直長)에 이르렀으나 곧 체차(遞差)되었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특별히 하교하여 이술원에게 대사헌(大司憲)을 추증하고, 이우방을 해조(該曹)로 하여금 승륙(陞六) 으로 조용(調用)하게 하고 해도(該道)에 명하여 즉시 올려 보내라고 하였다. 좌의정 조현명(趙顯命)이 말하기를,
"이봉상(李鳳祥)의 아들 이한필(李漢弼)이 죽은 뒤에 후사(後嗣)가 매우 영체(零替)합니다. 듣건대 이한필의 아들은 지금 이미 성장하였다고 하며, 홍임(洪霖)의 두 아들은 계속해 요절하고 다만 아들 하나가 있을 뿐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모두 충신(忠臣)의 후손이니, 마땅히 거두어 녹용(錄用)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한필의 아들은 해조로 하여금 상례(常例)에 구애받지 말고 조용하고, 홍임의 아들 역시 탁용(擢用)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재로가 말하기를,
"김종서(金宗瑞)의 아들 김승규(金承珪)는 김종서가 위급한 때를 당하여 몸으로 그 아비를 가로막다가 죽었으니, 그 충효가 숭상할 만합니다. 그 아비가 이미 복관(復官)되었으니, 김승규 역시 마땅히 똑같이 정려(旌閭)하여 포가(褒嘉)하는 도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디지털대전과 조선왕조실록의 차이점이 나온다. 디지털대전은 해월이 아이를 낳은지 아이가 7살때 요절하므로 죽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조선왕조 영조실록23년에는 한아이가 있어 탁용한다고 써있다. 영조23년이면 무신란(영조 4년)이 일어난지 19주년이 되는 해이다.년수의 차이가 있는데 실록의 년수가 맞지 않을까 한다. 1814년(순조 14) 목천 유생 민이혁(閔爾爀) 등이 상소하여 왕의 특명으로 정려되어 청주읍성 북문 안쪽에 있던 표충사의 동쪽에 정려문을 세웠는데, 1939년 표충사를 현재의 자리로 옮길 때 해월의 정려도 함께 옮겼다. 건물 안에 걸려 있는 편액에는 “㤠女 贈參判 洪公 房妓 海月之閭 上之十四年甲戌命旌(열녀 증참판 홍공 방기 해월지려 상지십사년갑술명정: 열녀 참판에 추증된 홍공(홍림)의 房妓 해월의 열녀각이 1814년에 정려됨).”이라고 쓰여 있다.
[표충사 경내에 자리하고 있는 해월의 열녀각이다]
해월의 무덤은 단기4287년 6월1일(1954년6월1일)에 이곳으로 이장되였으며 비석은 청주시와 표충사유지회에 의하여 단기4288년6월1일 (1955년 6월1일) 에 세워졌다. 비석의 전면에는 열녀김해월지묘(㤠女金海月之墓)라고 새겨져 있으며 비석의 상단에는 특이하게도 태극기를 새겨놓았다.
비석의 뒷편에는 해월의 묘지이장과 비석건립에 관한 내용이 적혀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4년3월15일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적(賊)이 청주성(淸州城)을 함락시키니, 절도사(節度使) 이봉상(李鳳祥)과 토포사(討捕使) 남연년(南延年)이 죽었다. 처음에 적 권서봉(權瑞鳳) 등이 양성(陽城)에서 군사를 모아 청주의 적괴(賊魁) 이인좌(李麟佐)와 더불어 군사 합치기를 약속하고는 청주 경내로 몰래 들어와 거짓으로 행상(行喪)하여 장례를 지낸다고 하면서 상여에다 병기(兵器)를 실어다 고을 성(城) 앞 숲속에다 몰래 숨겨 놓았다. 이에 앞서 성안의 민가에서 술을 빚으니, 청주 가까운 고을 민간에 적이 이르렀다는 말이 무성했다. 병사(兵使) 이봉상을 보고 말한 자가 있었으나 이봉상이 믿지 않고 설비를 하지 않으니, 성안의 장리(將吏)로서 적에게 호응하는 자가 많았다. 이날 밤에 이르러 적이 이봉상이 깊이 잠든 틈을 타 큰 소리로 외치며 영부(營府)로 돌입하니, 영기(營妓) 월례(月禮) 및 이봉상이 친하게 지내고 믿던 비장(裨將) 양덕부(梁德溥)가 문을 열어 끌어들였다. 이봉상이 창황하게 침상 머리의 칼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적이 끌어내 칼로 위협했다. 이봉상이 크게 꾸짖기를,
"너는 충무공(忠武公) 집안에 충의(忠義)가 서로 전해져 오고 있음을 듣지 못했느냐? 왜 나를 어서 죽이지 않으냐?"
하고 크게 세 번 외치니, 드디어 죽였다. 군관(軍官) 홍임(洪霖)이 변을 듣고는 돌입하여 이봉상 위에 엎드리며 말하기를,
"내가 진짜 절도사다."
하니, 적이 끌어내어 항복하라 협박했으나, 그는 끊임없이 욕을 퍼부었다. 이인좌가 탄복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충신이다. 죽이고 싶지 않지만 나를 죽일까 염려되기 때문에 죽인다. 그러나 일이 성사된 후 너의 후손을 녹용(錄用)하겠다."
하였다. 홍임이 다시 꾸짖기를,
"나에게는 본디 아들이 없지만 있다 하더라도 어찌 너 같은 역적에게 등용되겠느냐?"
하고는 드디어 죽었다. 적이 또 진영(鎭營)에 들어와 영장(營將) 남연년(南延年)에게 항복하라 협박하기를,
"네가 만약 항복하면 장차 크게 등용하겠지만 항복하지 않는다면 참(斬)하겠다."
하니, 남연년이 꾸짖기를,
"내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고 나이 70이 넘었는데, 어찌 개새끼 같은 너희를 따라 반역을 하겠느냐?"
하였다. 적이 꿇어앉지 않는 데 노하여 칼로 무릎을 쳤으나,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말하기를,
"어서 내 머리를 베어라."
하면서 끊임없이 꾸짖다가 죽었다. 우후(虞候) 박종원(朴宗元)은 상당 산성(上黨山城)에 있었는데 적이 부르니, 박종원이 투항하였다. 이인좌가 자칭 대원수(大元帥)라 위서(僞署)하여 적당(賊黨) 권서봉(權瑞鳳)을 목사(牧使)로, 신천영(申天永)을 병사(兵使)로, 박종원(朴宗元)을 영장(營將)으로 삼고, 열읍(列邑)에 흉격(凶檄)을 전해 병마(兵馬)를 불러 모았다. 영부(營府)의 재물과 곡식을 흩어 호궤(犒饋)하고 그의 도당 및 병민(兵民)으로 협종(脅從)한 자에게 상을 주었다. 이봉상은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의 후손으로 임금이 그 충성을 가상히 여겨 좌찬성(左贊成)을 추증했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며, 청주(淸州)에 사당을 세우고 표충사(表忠祠)라 사호(賜號)했다. 남연년에게는 좌찬성을 추증했는데,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홍임(洪霖)에게는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추증하였고 그 마을에 정표(旌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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