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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청천면 대전리 경주방씨효열문(靑川面 大田里 慶州方氏孝烈門) 본문
청천면 대전리에 있는 김경배의 처인 경주방씨의 효열문입니다.
경주방씨의 효열문은 아들인 김석구의 효자문과 합설되여 있습니다.
김석구의 효자정려현판에는 효자통정대부김석구지문(孝子通政大夫金錫龜之門)일고 적혀있습니다.
김석구는 자는 경진이며 본관은 김해로 승지 김례인(金禮仁)의 후손이다.
청천면 대전리에 정려문이 세워진 김경배의 처 경주방씨의 아들이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되였으나 효부로 명성이 높았던 어머니 경주방씨가 병이 들어 위독하게 되지 백방으로 약을 구해 써보았으나 완치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걱정을 하고 있던 차에 "어느곳 바위굴에 명약이 있다"라는 꿈을 꾼후 다음날 아침 일찍이 그 장소를 찾아가 살펴보니 과연 암벽에 석용(石茸:석이버섯)이 많이 있었다. 이것을 가져다가 어머니께 올렸더니 병에 효과가 있었다.
또 겨울에 어머니가 잉어를 먹고 싶다고 하자 얼음위에 엎어져 신께 기도하며 슬피우니 얼음구멍에서 큰 잉어가 튀여올라오는 기이한 일도 벌어지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김석구의 효도에 하늘이 감동하여 벌어진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후에 김석구의 효행사실을 향토유림이 추천하고 관찰사가 조정에 알리므로 고종때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이르렀다.
경주방씨는 젊은나이에 혼자가 되여 홀어머니를 극진으로 봉양하는 한편 아들인 김석구를 열십히 키웠다.
그러던 어느날 혼자된 경주방씨를 범하고자 괴한이 침입하였다.경주빙씨는 온힘을 다하여 저항하였다.험한 욕을 당하지는 않았지만
외간남자에게 겁간을 당하려했다는 사실에 고개를 들수없다고 생각하고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현판에는 효열부학생김경배처유인경주방씨지문(孝烈婦學生金慶培妻孺人慶州方氏之門)이라고 적혀있다.
경주방씨는 온양방씨로 통합되였다고 하는데 확실치는 않은 듯 하다.
온양방씨는 중국 염제 신농씨의 13세손인 방뢰가 중국 하남지방에 살때 방씨란 성을 받았다. 온양 방씨의 시조인 방지는 방뢰의 134세손이며, 당나라에서 한림학자로서 황제의 명을 받고 669년(신라 문문왕9년) 신라에 와서 설총과 함께 육례 구경의 대지를 밝힌 동방유학의 한사람이다. 그후 상주에 정착하여 살았기 때문에 상주란 본관을 사용했고 그후 방운이 온수(온양)군에 봉해짐에 따라 온양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시조인 방지로부터 방운 까지는 문헌이 없어져서 방운을 1세 조상으로 하고있다. 상주 방씨, 신창 방씨, 군위 방씨는 모두 온양으로 합본되었다.
시조 방지(方智)는 당(唐)의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서기 669년(신라 문무왕 9)에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로 신라에 와서 설총(薛聰)과 함께 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嘉猷縣: 상주의 옛 이름)에 정착하였다. 그의 후손으로 전해지는 방운(方雲)은 고려 태조를 도와 후백제를 정벌하는 데 무공을 떨쳤고 고려 창업에서부터 성종 대에 이르기까지 60여년 간 6대에 걸쳐 무공을 쌓아 중무장군(中武將軍)과 대장군(大將軍)을 거쳐 좌승지(左承旨), 지성사(知省事) 등을 역임한 후 좌복야(左僕射)에 이르렀다. 993년(성종 12) 거란(契丹)이 침입했을 때 방운은 공훈을 세워 온수군(溫水君: 온수는 온양의 옛 명칭)에 봉해지고 온양(溫陽), 신창(新昌), 아산(牙山)의 3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받았다. 후손들은 방지를 시조로 하고 방운을 1세조로 하고 온양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계승하였다.
- 분파:
방운의 12세손 방우선(方于宣), 방우번(方于蕃), 방득세(方得世)의 아들 대에서, 방서(方曙)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 방현(方玄)을 파조로 하는 간의공파(諫議公派), 방훤(方暄)을 파조로 하는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방적(方迪)을 파조로 하는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방가달(方可達)을 파조로 하는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방신우(方臣佑)를 파조로 하는 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 방신제(方臣悌)를 파조로 하는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로 분파되었으나, 안렴사공파와 상락부원군파는 절손되었고 현재는 다섯 파만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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