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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서면 동평리 충혼탑(郡西面 東坪里 忠魂塔)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군서면 동평리 충혼탑(郡西面 東坪里 忠魂塔)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1. 8. 19:20

 

 

군서면 동평리에 있는 국가보훈처현충시설로 군서면 관리번호 25-2-21입니다.

이 비들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신을 초개와 같이 버리신 순국선열과 호국영령들이 숭고한 희생과 위훈을 기리고자 건립되였다.

 

 

 

비를 바라보며 왼쪽부터부터 김순구순절비,충혼탑,반공투사위령비이다.

 

 

 

동평리(東坪里)는 원래 옥천군 군서면 월서화리(越西化里)에 속해있던 마을로, 후에 금산리(金山里)와 동평리로 분구하여 오늘에 이른다.1739년 여지도서에 보면 군서면 월서화리라 하여 88호가 살았고, 1891년 신묘장적의 기록에는 100호가 살았는데 이때는 지금의 금산리와 동평리를 관할하였다.

1908년 군, 면을 조정하면서 군서면을 둘로 나눌 때 월서화리는 군서이소면(郡西二所面)에 속하게 되었다. 1914 행정구역 일제 정비 때 군서일소면(郡西一所面)과 군서이소면을 다시 합쳐 군서면이라 고치면서 이때 월서화리를 동평리와 금산리로 나누게 되었다.동평리라 부르게 된 것은 자연마을을 합쳐 새로운 한 개의 리동을 만들면서 동산마을의 동 자와 평곡의 평자를 한자씩 취하여 동평리가 되었다.


동산마을은 마을의 동쪽 높은 곳에 위치하였다가 하여 동산(東山)이라 부르게 되었으며, 안말과 새터 등 두개의 자연마을이 있다. 평곡(坪曲)은 평촌(벌말)과 곡촌(곡말)을 합하여 평곡이라 부르게 되었다.마을에는 오리소류지와 말랑소류지가 있다.. 동평리의 자연마을은 동산, 벌말, 곡말 등이 있다.동평리는 군서면에서 옥천읍으로 넘는 고개가 있었고, 이를 성재라고 했다. 이 성재는 옥천읍에서 군서면으로, 군서면에서 옥천읍을 오가는 큰 길이었다. 이 성재 정상에는 동평산성이 있어 신라가 접경에 쌓은 삼국시대 산성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동평리에는 군서초등학교가 있다. 군서초등학교는 1909년 군서면 은행리에 지역유지들의 후원으로 군서초 전신인 사립 화명학교가 설립되었고, 1921년 군서공립보통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은 이래 1925년에 은행리에서 동평리로 이전했다.


또 군서면사무소와 파출소는 오동리에 있다가 1935년께 현 위치로 옮겨왔다. 별정우체국으로 출발한 군서우체국은 1966년, 군서면내 5개리에서 시작된 군서농업협동조합은 1969년에 각각 설립되어 현재도 운영되고 있다.이처럼 동평리는 군서면 각 행정기관과 금융기관 등이 집중된 중심마을이다. 37호 국도가 마을 가운데를 지나고, 최근 소재지 외곽으로 시행하는 옥천읍-금산군간 37호 국도 확포장공사가 완공되면 교통사고 위험성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면사무소 앞에는 1919년 3.1운동 당시 군서면 하동리 주민들과 함께 하동리 만세봉에서 만세시위를 펼치다 투옥됐다가 순국한 김순구 순국선열을 비롯한 26명의 독립운동가를 기리는 비석을 세워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고 반공투사위령비와 군서면 충혼비가 세워져 있다.

 

 

 

김순구순절비는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김순구선생의애국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절비이다.

김순구(1867-1919)는 독립운동가이다. 충북 옥천() 출생으로 1910년 국권피탈 때 구국운동을 전개하였고, 1919년 3월 23일 3,000명의 군중을 이끌고 강내산()에서 봉화를 올렸으며 조치원()을 향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그 뒤 청주()·옥천에서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공주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다. 1977년 건국에 이바지한 공로로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1919년 3·1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한 독립 운동가 김순구의 애국충절을 알리고자 세웠다. 본래 해방 6개월 후인 1946년 3월 1일 군서 면민이 성금을 모아 면 민 일동의 이름으로 군서면 입구 오동리 앞길 옆에 세웠다. 도로변에 볼품없이 세워 져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보는 이들로 하여금 김순구의 애국충정을 항상 마음에 새기도록 했다.

 

 

 

충혼비는 6.25전쟁당시 조국수호를 위해 산화한 65분의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반공투사위령비는 무장공비와 전투중 사망한 8분의 위훈을 기리기 위해 세운비이다.6·25한국전쟁 당시 군서지서에 근무하다가 인근 서대산(904m)에 출몰한 무장공비와 싸우다 전사한 8명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위령비이다. 당시 인천상륙작전으로 퇴로가 끊긴 북한군이 호남 지역에서 속리산으로 접근하기 위해 서대산 지역에 자주 출몰하여 인근 주민을 괴롭혔다고 한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5일까지 6·25한국 전쟁 당시 조국 수호를 위해 산화한 65명 호국영령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면민이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