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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면 두암리 삼층석탑성혈(伊院面 斗癌里 三層石塔性穴) 본문
이원면 두암리에 있는 두암리삼층석탑의 기단에 있는 성혈(性穴)입니다.
이원리는 원래 옥천군 이내면(利內面) 현리(縣里)와 역리(驛里)가 합하여 이루어진 마을이다. 1739년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이내면 현리라 하여 106호, 역리에 41호가 살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1891년 신묘장적(辛卯帳籍)에는 현리 64호, 역리 61호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14년 행정구역을 전면적으로 조정하면서 면의 이름을 이내면(伊內面)으로 고치고 현리와 역리가 합하여 이원리가 되었다. 2007년말 현재 현남에 29호 52명, 현리에 78호 202명, 두암에 29호 71명이 살고 있다. 1929년 이남면과 이내면이 합하여 이원면이 되면서 이 마을이 면소재지가 되었다.
이원리가 된 것은 현리는 이내면의 소재지였기에 이내면(伊內面)의 이(伊)자와 역말에 토파역(土坡驛)과 우현원(牛峴院)이 있었는데 우현원의 원(院)자를 따서 이원리가 되었다. 현리(縣里)라 함은 신라초에는 소리산현(所利山縣) 이었고 경덕왕 이후부터 고려 때 까지는 이산현(利山縣) 이었으며 바로 이 마을이 현의 소재지였기 때문에 현리라 불러왔다.
현리는 대밭말, 선말, 장터로 구분 되는데 옛장이 있던 곳이므로 구장터라고 부른다. 대밭말 뒤쪽 성재산 남쪽기슭에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선생의 문집 판목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이 있는데 1986년에 자손들이 그 판각을 모두 경기도로 옮겨서 빈 집만 남아있다.
대밭말과 장터 사이에 창주서원지가 있는데 서원은 훼철되고 묘정비만 남아 있다. 묘정비의 비문이 마모되어 판독이 어렵다. 1998년 안남면 도농리에 조헌선생의 표충사를 다시 짓고 신도비에 비각을 세울 때 이 묘정비에도 비각을 세우고 주변에 잔디밭을 조성하였다.
선말은 선바위가 있는 마을이다. 다리골 입구 냇가에 서 있는 이 바위는 온 주민이 신성시하는 바위이다. 주변에 콘크리트로 치장을 한 것이 눈에 거슬린다.
역말은 역리라고도 불렀는데 이곳에 토파역이 있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다. 현의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 현남(縣南)이라 불리기도 한다.
두암은 말바우란 옛말을 한자화 할 때 말두(斗)자와 바위 암(岩)자를 써서 두암이라 하였는데 사실은 이곳에 백촌 김문기(白村 金文起) 선생의 별장인 마암계당(馬巖溪堂)이 있어 마암을 ‘말바우’라 부르게 되었는데 한자화 할 때 말 마(馬)가 아닌 말두(斗)자로 쓰게 되어 두암리가 되었다. 두암리에는 충청북도유형문화재 120호로 지정 받은 삼층석탑이 있다. 영동군과 경계지점인 월이산에 봉수지가 있어 옛날 영동군 용산면에 위치한 박달라산에서 받아 군북면 환산의 봉수대로의 통신을 담당하였다. 현리소류지가 있다.
성혈(性穴)은 바위그림의 한 종류로 돌의 표면에 파여져 있는 구멍을 말한다. 성혈은 주로 고인돌[支石墓]의 덮개돌[上石]이나 자연 암반에 새겨진다.
형태적 차이는 있지만 민속에서는 알구멍, 알바위, 알터, 알미, 알뫼 등으로도 불린다.
홈구멍이 새겨진 바위는 대체로 외부에 노출되어 있어 후대에 계속해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조성 시기를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보성 동촌리 고인돌처럼 땅속에 묻힌 하부 구조에서 홈구멍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졌음은 분명하다.
청동기시대에는 이러한 홈구멍 바위그림[岩刻畵] 이외에 전라남도 여수시 오림동 고인돌처럼 사람과 돌검이 새겨진 물상바위그림[物像岩刻畵]이나 홈구멍과 함께 새겨진 기하학적 바위그림도 확인되고 있어 다양한 형태의 바위그림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선사시대에 있어서 가장 큰 신앙의식은 생존을 위한 기원으로 신변 안전이나 식량 확보를 위한 개체 보존과 종족을 이어가기 위한 종족 보존이 주된 형태였을 것이다. 이러한 기원의 형태는 선사시대에는 여러 가지 방법과 형태로 표출되는데, 그 중의 하나가 홈구멍으로 표현된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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