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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석굴암 석물(吐含山 石窟庵 石物)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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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함산 석굴암 석물(吐含山 石窟庵 石物)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1. 10. 06:18

 

 

석굴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음을 걸으면 오분정도를 걸으면 석굴암을 만날수 있다. 석굴암을 보며 오르다 보면 만날수 있는 석굴암 개보수시 교체된 부재등을 만날수 있다.

 

 

 

석굴암 석물이란 안내판을 만날수 있다. 이 곳에 있는 석조물들은 석굴암을 수리 (1913-1915,1962-1964)할 때 교체돤 구부재(舊部材)들과 기타 주변 석물들로 신라인들의 손길이 스며있는 귀중한 유물들이다. 이 석조물들을 제자리에 끼워 맞추어야 함에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니 석굴암의 보존에 많은 어려움이 발생했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때 재상인 김대성이 창건해서 혜공왕 10년에 완성하였다고 한다.그때는 석불사로 불렸으며 석불사로도 이 문서에 들어올 수 있다. 조선 시대 숙종 29년(1703년), 영조 34년(1758년)에 보수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 말기에 울산병사 조예상(趙禮相)에 의해 크게 중수되었다고 하나, 1909년 재발견되었을 당시 본존불의 코가 깨져 있고 연화대 또한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으며 "천장의 1/3이 무너지고 구멍에서 흙이 내려오고 있으니 이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한일합병 직전인 1909년, 잊혀져 있던 석굴암을 발견한 것은 경주의 한 우체국이었다. 토함산의 동산령을 넘어 동해안 지대로 배달 가던 우체부가 범곡 근처에서 능 같은 것을 발견했다. 가까이 가보니 입구에는 문이 있고 천장은 무너져 있었던 석굴암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석굴암의 보존 상태는 최악이었다. 당시 자료에 따르면 "천장 3분의 1이 이미 추락하여 구멍이 생겨 그 구멍에서 흙이 들어오고 있어 그대로 방치할 경우 모든 불상이 파손될 위험이 있다"고 적혀 있을 정도로 보존 상태가 극히 불량하였다. 특히 본존불의 코는 깨지고 연화대도 심하게 갈라지고 깨져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 반출될 뻔하기도 했으나 현지 관리가 이를 거절하였고, 총독 데라우치가 이곳을 시찰한 뒤 석굴암을 제자리에 두되 현지에서 보수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되면서 한국에 남아있게 되었고 보수가 시작되었다.1913년 10월부터 감개돌을 고정하기 위한 공사를 시작으로 석굴 천장 부분에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였고, 1914년 8월 말 돔형 지붕을 분리하여 완전 해체한 후, 1915년 5월 석굴을 재조립하는 등 1915년 9월까지 석굴을 완전히 해체하고 복원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이 과정에서 불상을 습기로부터 차단하고 석병을 보강하기 위해 유럽이 자국의 문화재를 복원하듯 당시의 최첨단 건축기법을 도입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석굴 밖에 외벽이 세워졌고 외벽과 석굴 사이에 콘크리트가 채워졌다. 그 결과는 당시 과학으로는 몰랐던 문제 중 하나로서 시멘트가 화강암을 손상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로는 석굴암의 구조를 전부 파악하지 못한채 공사를 강행하여 내부벽과 불상 표면에 엄청난 양의 결로와 이끼가 나타났다. 1917년 누수 현상과 습기 등으로 바닥과 천장 위로 물이 스며드는 문제가 나타나자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천장의 방수를 위한 보수공사를 실시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습기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1927년에는 푸른 이끼를 없애기 위해 증기 세척을 했다. 당시 보수 공사 비용은 당시 돈으로 22,726원. 지금 가치로 대략 38억 원 정도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