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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노암리 하마비(道安面 老岩里 下馬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도안면 노암리 하마비(道安面 老岩里 下馬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2. 13. 19:37



하마비(下馬碑)는 말에서 내려서 걸어야 한다는 표지석이다.

이 비가 행갈마을에 있는것은 기성전이 있기 때문이다. 마을을 찾아올 때 여기서 부터는 말에서 내려 걸어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표지석이다.

이 하마비는 행갈마을에 있는 기성전의 하마비로서 노암1리 경로당 한옆에 자리하고 있다.



이 하마비의 높이는 76센티 너비 40센티로 전면에 한자로 下馬碑라고 쓰여있다.



노암리(老岩里)는 1914년에 노상리(老上里),노하리(老下里)와 백암리(白岩里)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 노암리는 도안면사무소에서 서북쪽 3km 거리에 있다. 두타산에서 이성산에 이르는 능선이 증평읍 미암리와 경계를 이루고, 두타산 정상에서 진천군 초평면과도 경계를 이룬다. 북쪽으로는 연촌리, 동북쪽으로는 송정리, 동쪽으로는 화성리와 접해 있다.

노암1리(老岩一里)는 행갈/황포(黃浦) 라고도 불리운다 ‘행갈’은 노암1리 중심마을이다. ‘역전’에서 ‘행정고개’ 너머에 있는 마을이다. ‘행갈’은 이성산 동쪽에 자리 잡은 마을로 면사무소가 위치한 화성리에서 서쪽으로 2.3km 떨어져 있다. ‘행갈’의 동쪽에는 화성3리가, 서쪽에는 증평읍 미암4리 ‘시화’가, 남쪽에는 증평읍 미암5리가, 북쪽에는 ‘진등’이 접해 있다. ‘행갈’의 뜻이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다만 경북 상주시 외서면 봉강리 ‘행갈’[마을]에는 지명과 관련된 전설이 전한다. 예전에 염백호라는 사람이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였던 바, 염백호가 죽은 후 산 칡이 은행나무까지 내려와서 3년간이나 띠를 두르고 흰 꽃이 피었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 마을을 ‘은행나무’와 ‘칡’을 관련시켜 ‘행갈(杏葛)’이라 불렀다고 전한다. ‘행갈’은 지금부터 대략 500여 년 전 청주한씨(淸州韓氏) 정혜공파 한상례(韓尙禮)가 충남 연기군 전의에서 화성리 ‘명암’을 거쳐 이곳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 그 후 곡산연씨 등이 차례로 입촌하면서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행갈’은 일제 강점기 이후 ‘황포(黃浦)’로 불렸으나, 최근에 다시 본래 마을 이름을 살려 ‘행갈’로 부르고 있다. ‘황포’라는 이름은 옛날 마을 한복판으로 개울이 흘렀는데 비가 많이 오고 난 후면 마을에 누런 흙탕물이 범람했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상촌(上村) 은 ‘행갈’ 남쪽 ‘단지배골’ 앞에 있는 마을이다. ‘상촌’은 ‘행갈 위쪽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진등/신곡(新谷) 은 『호구총수(戶口總數)』(정조 13년, 1789)에는 이 마을과 관련된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舊韓國地方行政區域名稱一覽)』(1912)의 ‘신곡(新谷)’으로 불리던 곳이다. 『조선지지자료(朝鮮地誌資料)』(1914년 이전)에도 ‘新谷/진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마을은 ‘뇌실’ 남쪽 긴 등성이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따라서 붙은 이름이 ‘진등’이다. 원래 이 마을은 ‘행갈’에 속한 마을이었으나, 마을이 커지자 1912년 이전에 분리된 것으로 보인다. 이 마을이 ‘행갈’에서 분리되면서 ‘신곡’이라고 불린 것이다. ‘산곡’은 ‘새로 생긴 마을’을 뜻한다. ‘진등’은 연이찬이 약 360여 년 전에 송정리에서 입향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충주지씨,청주한씨,나주라씨 등이 입촌하면서 현재의 마을을 이루었다. ‘진등’은 이성산에서 북동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에 있는 산촌 마을이다. 마을 양 옆으로 산줄기가 있어 마치 삼태기 안에 마을이 있는 듯이 아늑하다. 이 마을은 도안면사무소[화성리]에서 서쪽으로 2km 떨어져 있다. 마을 동쪽에는 화성1리가, 서쪽에는 증평읍 미암4리 ‘대지랭이’가, 남쪽에는 ‘행갈’이, 북쪽에는 ‘뱀티’가 있다. ‘진등’에는 예전에 ‘행갈’과 공동으로 지내는 산신제와 용왕제가 있었다. 이 같은 마을 공동생활을 하기 위하여 100여 년 전에 ‘행갈’과 공동으로 구성된 대동계와 ‘진등’ 단독으로 구성된 소동계가 있다. 소동계는 60년 전에 구성되었으며, 계금은 자연마을 자금으로 쓰인다. 그리고 예전에는 농악대가 있어서 음력 7월 15일[백중], 음력 1월 15일[대보름]에 농악놀이를 하였으나 현재는 사라졌다. 일제시대 ‘진등’에는 야학이 개설되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