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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안면 노암리 기성전(道安面 老岩里 箕聖殿)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도안면 노암리 기성전(道安面 老岩里 箕聖殿)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2. 15. 17:39

 

 

기성전은 기성사(箕聖祠) 또는 기자영당(箕子影堂)이라고도 하는데 도안면 사무소에서 고개를 넘어 다다르는 노암1리 행갈마을 중앙에 위치하고 있다. 요즈음 새로 보수를 하여 새로 단장을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평양과 함흥등에 기성전을 건립하고 기자를 배향하였다.

 

 

 

이 기성전은 이곳에 거주하던 청주인 한학자 한응각(韓應珏)이 청주한씨가 기자의 후손임을 믿고 매년 수차례 평양의 기자묘에 가서 참배하는데 어려움이많아 기자영정을 모사하여 이를 모시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한응각(韓應珏. 1866-1929)은 1913년 기자영정을 모셔와 향나무를 심고 이듬해 이곳에 기성전을 건립하여 매년 음력 3월15일과 9월 15일에 근처의 유생들과 함께 제향하였다.이때 시회(詩會)를 열어 학문을 논하면서 학문이 뛰여난 학자를 불러와서 기자의 교민(敎民)8條를 강의하였다고 한다.

 

 

 

한응각이 1913년 기자영정을 이곳으로 봉안하여 올 때 함흥의 유림들이 향나무 5그루를 선물하여 이를 기성전 뒤에 심었다고 전하는데 지금도 그 때 심은것으로 보이는 향나무가 있고 뜰에는 좌우측에 은행나무가 한그루씩 서있다.

 

기자영정은 가로41.5 세로 93.5센티의 크기로 김이삼(金貳參)이 모사한것 이다. 건물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의 목조기와집으로 솟을대문에 담장을 두르고 홍살문을 세웠는데 1922년과 1969년 그리고 최근에도 보수한 흔적이 보인다.지금도 근처의 유림들이 봄과 가을에 제향을 올리고 입구에는 안내판이 있다.

 

 

 

이 기성전의 건립연대에는 3가지 설이있다.

1. 철종5년(1854년)-청주대박물관 [괴산군문화유적] 1994년 76쪽,

2. 고종17년(1880년)-충청북도 문화재지(1982년)483쪽.

3. 현재 기성전앞 간판에 표기된 1914년. 이렇게 3가지 설이다.

이 기성전을 건립한 한응각(1866-1929)의 생몰년대와 1969년 기성전을 수리할 때 나온 상량문에 1913년 영정을 모셔오고 1914년 갑인(甲寅)에 건축하였다고 적혀있는것으로 보아 기성전의 건립시기는 1914년으로보는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기자(箕子)는 중국 상()의 군주인 문정(, 이라고도 함)의 아들로 주왕()의 숙부()이다. 주왕()의 폭정()에 대해 간언()을 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친 척을 하여 유폐()되었다. 상()이 멸망한 뒤 석방되었으나 유민()들을 이끌고 주()를 벗어나 북()으로 이주하였다. 비간(), 미자()와 함께 상()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으로 꼽힌다.

성()은 자(), 이름은 서여()이다. 기(, 지금의 西 )에 봉()해져 기자()라고 한다. 상()의 28대 군주인 문정(, 이라고도 함)의 아들로 주왕()의 숙부()이다. 농사()와  상업(), 예법() 등에 두루 능통하였으며, 상()을 떠나지 않고 주왕()의 폭정()에 대해 간언()하다 유폐()되어 비간(), 미자()와 함께 상()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으로 꼽힌다.

기자()가 봉()해진 기()는 상()의 영토 가운데 가장 북쪽이고, 토방(), 귀방() 등으로 불리는 북방() 이민족()이 강성()했던 지역이다. 기자()는 이들 이민족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여 복속()시켰고, 그러한 공을 인정받아 태사()로서 형인 제을()을 보좌하며 상()을 융성()케 하였다.

하지만 제을()의 뒤를 이어 주왕()이 즉위한 뒤 상()은 급격히 쇠락하였다. 주왕()은 자신의 재능을 과신()하여 신하의 간언()을 듣지 않았으며, 달기()를 총애하여 호화로운 궁궐을 짓고 ‘주지육림()’의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 기자()는 형인 비간()과 함께 주왕()에게 거듭 간언()하며 정치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주왕()이 상아젓가락[]을 만들게 하자 기자()가 “상아젓가락으로 식사를 하게 되면 그 때까지 사용하던 질그릇이 성에 차지 않아 옥그릇을 만들게 하고, 옥그릇을 쓰면 요리가 성에 차지 않아 진귀한 음식을 만들게 하고, 다음에는 화려한 복장과 호화스런 궁궐을 만들게 한다”며 간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여기에서 하찮은 낭비가 망국()의 사치로 이어진다는 ‘상저옥배()’라는 말이 생겼다.

하지만 주왕()은 폭정()을 멈추지 않았으며, 간언()을 하는 숙부() 비간()의 충심()을 확인한다며 몸을 갈라 심장을 끄집어내는 만행()을 저질렀다. 사람들은 기자()에게 상()을 떠날 것을 권했지만, 기자()는 신하된 도리로 임금이 간언()을 듣지 않는다고 떠나는 것은 임금의 악행()을 부추키는 것으로 따를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풀어 미친 척을 하며 남의 노비가 되려 하였다. 하지만 주왕()은 그를 사로잡아서 유폐()시켰다.

주()의 무왕()은 충신()을 잔인하게 살해한 주왕()을 토벌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제후들을 규합하여 상()을 공격하였으며, 기원전 1046년 상()을 멸망시켰다. 그는 갇혀 있던 기자()를 풀어주고, 그를 찾아가 정치()에 대해 물었다. 기자()는 무왕()에게 하()의 우() 임금이 정했다는 아홉 가지 정치의 원칙을 전했다고 한다. 이를 ‘홍범구주()’ 혹은 ‘기주()’라고 하며, <서경()>의 ‘홍범편()’에 그 내용이 전해진다.

하지만 기자()는 주()의 신하가 되기를 거부하며 상()의 유민()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주했다. 당시 기자()가 상()의 멸망을 슬퍼하며 지었다는 ‘맥수지시()’에서 ‘맥수지탄()’이라는 성어가 비롯되었다. 일부에서는 기자()가 한반도()로 옮겨가 그 곳에 기자조선()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이러한 ‘기자동래설()’은 <사기()> ‘송미자세가()’, <한서()> ‘지리지()’, <상서대전()>의 ‘은전()’, <삼국지()>의 ‘위지()’ 등의 중국 사서()와 <삼국유사()>, <제왕운기()>, <동국사략()> 등의 고려()와 조선() 시대의 사서()들에 나타나 있다. 조선() 시대에는 이러한 기자동래설()에 근거하여 단군()과 함께 기자()의 제()를 지냈으며, 그의 사당()을 세우기도 하였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요동()과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가 중국과 크게 다르며, 한() 이전의 기록들에서는 기자()가 조선()으로 갔다는 기록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근거로 하여, 기자동래설()이 역사적 사실과는 거리가 먼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기자[箕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