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옥천읍 교동리 정광제효자문(沃川邑 校洞里 鄭匡濟孝子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옥천군(沃川郡)

옥천읍 교동리 정광제효자문(沃川邑 校洞里 鄭匡濟孝子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4. 29. 22:02



교동리(校洞里)는 원래 읍내면(邑內面) 향교리(鄕校里)와 고수동리(高樹洞里)에 속해 있던 마을로, 후에 두 마을이 합하여 옥천읍(沃川邑) 교동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1739년의 기록을 보면 향교리에 23호, 고수동리에 26호가 살았다고 되어 있다. 1910년 행정구역 전면 조정 때 읍내면과 군남면이 합하여 군내면으로 되면서, 향교리와 고수동리를 합하여 교동리라 하였다.

교동리라 부르게 된 것은 조선 태조 7년(1398년)에 지방의 영재를 기르기 위한 향교(鄕校)를 세웠기 때문이며, 처음에는 향교리라 부르다가 교동리라 하게 되었다. 향교 앞에는 조선시대 충신의 묘역이나 향교 앞에 세워 경건한 마음자세를 가지도록 했던 하마비가 세워져 있다.

자연마을로 교동, 섶바탱이(이곳이 원래 군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위치했으므로 나무지게(섶)를 지고 가다 한 번 쉬어간다(바탱이)는 설이 설득력이 있다), 고수골(구읍지역에서 저수지 쪽으로 올려다보면 높게 보이는 곳에 있기 때문에 고수골이라 했다는 설이 설득력 있다)이 있었으나 교동저수지가 축조되면서 고수골은 없어졌다. 또 수북리를 넘는 고개는 나부티재와 나부티샘이 예부터 유명했다.

교동리에는 또 박정희 전 대통령의 부인으로,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육영수 여사가 태어난 생가가 있으며 무너졌던 것을 2008년 복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육영수 여사 생가 복원사업은 본래 생가가 조선시대 3 정승이 살았던 집으로, 양반가옥 형태를 보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화재 가치를 지닌 것으로 평가됐으며, 이에 따라 충청북도 문화재로 지정되면서 복원사업이 추진되게 되었다.

교동리 뒤로는 옥천의 진산이라 불리는 마성산이 자리하고 있다. 해마다 정월대보름이면 옥천고을 전체의 안녕을 비는 마조제가 마성산을 바라보며 올려지는 것은 마성산이 옥천의 진산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교동저수지가 있어 문정뜰에 농업용수를 대고 있으며, 저수지 입구 옥천어린이집 앞에는 조선시대 옥천군수를 비롯해 옥천을 거쳐 간 많은 관리들의 공적을 알리는 공적비와 송덕비 등이 세워져 있는 비석거리가 있다.




정광제(鄭匡濟)는 1688년(숙종 14)∼1753 영조29년)는 조선후기의 문신이며 효자이다.

본관은 연일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정직,할아버지는 정지하이다,아버지는 정상직이며 어머니는 홍응원의 딸인 남양홍씨이다.

유복자로 태어나 옥천읍 교동리에서 성장하였다.



비록 정광제는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바르게 성장하여 학문수학에 힘쓰고 독서에 열중하였다.

1717년(숙종43) 온양정시 병과2위로 급제하고 1725(영조1)병조정랑이 되었다. 같은해에 사간원정원 사헌부 장령을 지냈다.

사헌부 장령으로 있을때 삼남지방 수령들이 재앙을 입은 논 밭에 대하여 공평하게 힘써 주지 않고 부정을 저지르니 이를 엄하게 다스리고 죽은 사람에게도 세금을 부과하는 백골징포등을 고발하는 상소를 올려 시정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1727(영조3)에는 세자의 강학에 참여하는 세자시강원 필선에 임명되었다가 다시 사간원 정원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당색이 강한자를 제거해 탕평하려는 영조의 정책으로 정미환국이 일어나자 파면되었다 1732(영조8)4월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으나 9월에 국상에 불참하여 파직되고 불서용의 처벌을 받았다.1733(영조9)사헌부 장령으로 재기용 되었으며 1738(영조14)세자시간원의 필선 사간원 헌납 1739(영조15)사헌부 장령 1747(영조23)우부승지,승지에 임용되었다. 이어 동지의금부사가 되었다.관직생활동안 항상 부정과 불의를 멀리하고 청렴한 관료생활을 유지하였다.



그는 유복자로 태여났기 때문에 늘 아버지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효도한번 해보지 못한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였다.

그러더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회갑이 되는 해에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아바지의 산소옆에 묘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였다.

이 기간동안 정광제는 상복을 갖추고 죽과 소찬으로 끼니를 때우며 지극정성을 다하였다.


예전의 효자각의 모습입니다. 지금은 새로 단청도 장식했고 새로 보수를 하였습니다.

가까운 곳에서 볼수있으면 좋으련만 시건장치가 효자문과의 거리를 만들어 놓습니다.



그는 1753(영조29) 6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효행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1754년에 정려되고 1755년 그의 고향 옥천 교동리 옥천향교옆에 효자문이 세워졌다.

효자문에는 효자가선대부행용양위부사직겸동지의금부사위도총부부총관정광제지려(孝子嘉善大夫行龍讓衛副司直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摠府副摠管鄭匡濟之閭)라고 편액이 걸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