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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송자대전(淸州博物館 宋子大全)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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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박물관 송자대전(淸州博物館 宋子大全)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7. 18. 18:32



청주박물관에 전시되여 있는 송자대전입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송시열()의 시문집입니다.



송시열의 문집은 ≪송자대전≫의 간행에 앞서 두 종류가 더 있다. 즉, 1717년(숙종 43)에 민진후()의 건의에 따라 왕명에 의하여 교서관()에서 철활자()로 간행한 ≪우암집 ≫과, 이보다 앞서 송시열의 수제자인 권상하()가 편집한 이른바 황강본() 수백 권이 있다.

교서관에서 간행한 ≪우암집≫은 본디 본집과 별집 9권을 포함하여 167권이었고, 뒤에 간행한 ≪경례문답 ≫을 합하여 191권이 되었으며, 나중에 부록 및 1732년(영조 8)에 연보 5권이 간행되었다.

교서관본은 일명 운관본()이라고도 하는데, 대체로 송나라 장식()의 문집인 ≪남헌집 ≫의 범례를 따른 것이다.

≪송자대전≫은 운관본 ≪우암집≫의 본집과 별집, ≪경례문답≫·부록·연보 등과 황강본을 대본으로 하여 이를 교정, 첨삭하고 ≪주자대전 ≫의 편차 방식에 따라 엮은 것이다. 문집의 제목을 ‘송자대전’이라고 한 것은 이미 조야()에서 송시열이 ‘송자()’로 일컬어지고 있었고, 당시 사림의 중론을 따른 때문이다.

≪주자대전≫의 편차 방식을 따랐으므로 ≪우암집≫과는 그 편집의 차례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 또 ≪우암집≫에는 연보가 1726년까지의 기사만 있었으나 ≪송자대전≫에는 1750년부터 1787년까지의 기사를 추록하였다. 이 판본은 평안 감영에서 각인되었는데, 이 때문에 기영본()이라고도 한다.

이것이 1907년(순종 1)에 병화로 소실되자, 1929년 후손과 지방 유림들의 협력으로 대전 가양동 소재 남간정사()에서 대전()의 중간()이 이루어졌다. 이 때 ≪송서습유 ≫ 9권 4책과 ≪송서속습유 ≫ 1권 2책도 아울러 간행되어 모두 225권 108책에 달한다.

그 밖에 1977년≪송자대전≫을 영인, 반포하면서 ≪송자서 ≫를 편집, 간행하였다. 여기에는 ≪송자대전부록≫에서 발췌한 1책과 정조가 지은 ≪양현전심록 ≫중 송시열에 관한 것 2책, 송시열의 언행록 1책, ≪송자대전수차 ≫ 5책, ≪송자대전목록≫ 3책, ≪화양연원록 ≫ 1책 등을 묶었다.





≪송자대전≫의 권두에는 8편의 어제() 묘비명과 제문, 그리고 어필()의 발문과 <대로사묘정비명 >이 수록되어 있어 그의 정치적 위상을 엿볼 수 있다.

권1에는 부() 1편과 오언고시·칠언고시 수십편, 권2에는 오언절구·칠언절구, 권3에는 오언율시, 권4에는 칠언율시가 수록되어 있다.

권5에는 <기축봉사 >와 <정유봉사 >가 있다. <기축봉사>는 효종 즉위초에 시무() 및 유학의 정치적 이상을 13개 조항에 걸쳐 개진한 것으로서 특히 마지막 조항인 “정치를 잘하여 오랑캐를 물리치라()”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권6에서 권21까지 16권에 걸쳐 소() 및 소차가 실려 있다. 소는 대체로 사직소가 주종을 이루고, 차의 경우는 퇴귀(退)에 관한 것과 시정()에 관한 것이 주종을 이룬다. 이를 통하여 선비의 진퇴의 의리()와 송시열의 인격, 그리고 당시의 정치적 실상을 실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다.

권23에서 권25까지는 서계(), 권26은 헌의()로서 형식은 소·차와 구별되나 내용에 있어서 큰 차이는 없다. 대체로 예학()에 관한 논의가 많고 그 밖에 시정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권27에서 권129까지 무려 103권에 걸쳐 수천 통의 서한이 수록되어 있다. 대상은 대신·사우·문인·자손들로부터 각지 서원의 원생들에까지 걸쳐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김상헌()·김집()·안방준()·이경여(輿)·이후원()·송준길()·유계()·홍명하()·권시()·이유태()·정태화()·이완()·이단하()·김수흥()·김수항()·민정중()·민유중()·박세채()·김만중()·김석주()·남구만()·조지겸()·권상하·김창협()·이희조()·김간()·윤증()·나양좌() 등 당시 정계·학계의 인물들이 총망라되어 있다.

권130에서 권136까지는 잡저가 수록되어 있다. <호연장질의 >·<주자언론동이고 >·<근사록오본변증 >·<퇴계사서질의의의 退>·<간서잡록 >·<예설 >·<논어말즉시본설 >·<시민여상설 > 등과 과의()였던 <일음일양지위도 > 등 그의 성리학적 철학 사상과 도학정치 사상 등을 담고 있다. 그 밖에 여러 편의 자설()과 <독락정기후설 > 등이 있다.

권137에서 권139까지는 서()가 수록되어 있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농가집성서 >·<포은선생시집서 >·<구황촬요서 >·<근사록석의후서 >·<청음선생유사서 >·<회덕향안서 >·<사계선생유고서 稿>·<논맹혹문정의통고서 >·<주자대전차의서 > 등 각종 시문집과 국가 시책에 의하여 출간된 주요 문헌·연보·족보 등에 대한 서문을 수록하고 있다.

권140에서 권145까지는 기()로서 주로 정사()·의창()·당재()·누()·서원 등에 대한 것이다.

권146에서 권149까지는 발문 및 후서()들이다. 대표적인 것으로는 <효묘어필첩발 >·<숭정황제어필발 >·<퇴계선생진적발 退> 등을 들 수 있다.

권150에는 <지지와명 > 등 12편의 명과, 1편의 <주일재잠 >, 4편의 찬(), <장손은석혼서 >를 비롯한 7편의 혼서, <옥천군학성묘중수상량문 > 등 5편의 상량문이 수록되어 있다.

권151에는 <소현서원고주자문 > 등 70편의 축문, 권152·153에는 <여동춘초려제사계선생문 > 등 15편의 제문과 애사 1편, 권154에서 권170까지는 <포은정선생신도비명 >·<남명조선생신도비명 > 등 96편의 신도비명이 수록되어 있다. 신도비가 종2품 이상의 관원들에게 해당하는 것임과, 그리고 그 대상의 다양함을 생각할 때 송시열의 정치적·학문적 위상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권171에는 <능주정암조선생적려유허비 >·<자운서원묘정비명 > 등 유허비·묘정비명, 그리고 정려비() 등이, 권172에서 권180까지 9권에는 송익필()의 묘갈을 비롯한 108편의 묘갈명이, 권181에는 <영릉지문 >·<인경왕후지문 > 등 3편의 능지가, 권182에서 권188까지는 김상헌·김집·송준길·김수항 등의 묘지명이, 권189에서 권201까지는 묘표, 권202에서 권205까지는 시장(시)이, 권206에서 권211까지는 조헌()·김장생()·윤황(), 그리고 송시열의 아버지 갑조() 등의 행장이, 권212에는 송준길의 유사()와 김장생·김집 등 송시열의 두 스승의 어록이 실려 있다.

권213에서 ≪송자대전≫의 마지막 권인 권215까지는 윤집()·오달제()·홍익한() 등 <삼학사전 >과 <임경업장군전>, 포수() <이사룡전 > 등을 비롯한 의인·충장()·용사()·효열()들의 전기 및 <은진송씨가전 > 등이 실려 있다.

≪송자대전부록≫은 모두 19권으로 권1에는 교서() 3편과 사제문() 12편, 권2에서 권12까지는 연보, 권13은 묘표 및 화상찬(), 권14에서 권18까지는 문인들이 기록한 송시열의 어록, 권19에는 <기술잡록 >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송서습유≫에는 권머리에 <효종대왕밀찰>·<명성대비언찰 >이 있고, 권1은 시·서계()·서(), 권2에서 권6까지도 서()로서 주로 문인과 가인()에게 보낸 것들이다.

권7에는 <악대설화 >·<고산구곡가번문 > 등 6편의 잡저, 권8에는 각종 서()·발·전()·축문·제문·신도비명·묘지명·묘표·유사가, 그리고 마지막인 권9에는 경연 강의가 수록되어 있다.

≪송서속습유≫는 1권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시 7수, 서간문 56편, 발 1편, 그 밖에 묘갈명·사제문·일기·묘지·묘표후기 등이 수록되어 있다.

그 밖에 1977년에 은진 송씨 문중에서 간행한 ≪송자서≫에는 ≪송자대전부록≫에 수록된 것 중에서 어제()의 사제문 등을 초록하였고, 또한 정조가 지은 주자와 송자를 대비한 ≪양현전심록≫ 중 송시열 관련 부분, 문인들이 기록한 송시열의 언행록과 ≪송자대전수차≫ 그리고 ≪송자대전목록≫ 및 ≪화양연원록≫을 수록하고 있다.

≪화양연원록≫에 따르면, 사우()로는 김장생·김상헌·김집·안방준·이경여·이후원·송준길·유계·정태화를 비롯하여 142인이 올라 있다. 문인으로는 권상하·김창협·이희조·민유중·김만중 등을 포함하여 800여인의 이름이 올라 있다.





≪송자대전≫은 다른 사람의 문집에 비하여 몇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표제의 특이성이다. 현존하는 문집 중에 ‘자()’가 붙은 것으로는 유일하다. 문집 자체가 ≪주자대전≫의 편차 방식을 취하고 있기도 하지만, 정조 대에 이르러 송시열은 주희와 더불어 나란히 현자()로 일컬어져 ≪양현전심록≫이 정조에 의하여 저술되기도 했으며, 학자로서 최고의 명예인 문묘()에, 그리고 정치인으로서 최대의 명예인 그가 섬기던 효종의 묘()에 배향되는 영광을 얻었고, 또한 조야에 걸쳐 ‘대로()’라는 극존칭을 얻은 유일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송자대전’이라는 표제가 가능하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송자대전≫에는 여느 문집과 달리 대부분의 내용이 소·차·서()·명·축문·제문·신도비명·묘갈명 등이라는 점이다. 이 책의 경우 시는 4권, 잡저는 7권이다. 특히, 서()는 권27에서 권129에 이르기까지 103권에 해당하여 전체의 절반 정도에 이른다.

그의 정치적·학문적 위상이 그대로 드러나는 증좌가 아닐 수 없다. 실로 17세기뿐 아니라 이후 조선의 정치나 사회·학술 사상의 연구에 있어 ≪송자대전≫의 소·차·서() 등은 필수불가결의 자료라고 아니할 수 없다.

셋째, ≪송자대전≫에 일관하고 있는 정신은 ‘직()’으로 압축되는 그의 춘추대의와 북벌, 존주정신()이다. 송시열의 성리학적 철학 사상과 예학은 주로 그의 잡저 및 서간문과 소에 산재되어 나타난다. 그 밖에 문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주자대전차의 ≫·≪주자어류소분 ≫·≪이정서분류 ≫·≪논맹문의통고 ≫·≪심경석의 ≫ 등을 통하여 규찰할 수 있다.

송시열의 성리학적 철학 사상은 주자―이이()―김장생으로 이어지는 선에서 전개된다. 그는 평생 주자를 독신()하였으며, 그 역사적 상황이 동일하다고 보아 주자의 철학 사상이나 그가 건의한 정책은 그대로 17세기의 조선에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가 효종 즉위 초에 올린 <기축봉사>도 실상 주자의 <기유의상봉사 >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철학 사상의 체계 및 그 논리적 정합성에 있어서는 송시열은 주자나 이이·김장생 등 그의 스승들보다 일관성을 견지한다. 예컨대, 송시열은 이이의 기발이승일도설()을 계승하지만 이 성리학적 기본 개념이요 전제를 당시의 학술 쟁점에 적용함에 있어서 매우 철저하다.

그의 형도기삼단설()·사단칠정합일설()·성정일리설()·천리인욕설() 등은 모두 기발이승일도인 한 이원적 설명은 용납될 수 없다는 전제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당시 학계의 주요 쟁점의 하나였던 이황()의 이발설()이 잘못되었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그는 <주자언론동이>의 저술에 착수하였으며, ≪주자대전차의≫를 저술하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기발이승일도에 의한 정학()의 천명()을 통하여 송시열은 당대의 시대적 사명이 춘추대의의 구현에 있다고 보았으며, 이는 그대로 민족의 정치적·문화적 자주성의 회복과 연결된다고 보았다.

그가 특히 의리 정신의 구현을 강조하고 그러한 인물들의 전기를 지어 표장()한 것, 그리고 무엇보다 한말 이항로() 문하의 유중교()·김평묵()·유인석()·최익현() 등, 의병운동의 선봉에 섰던 인물들이 모두 송시열을 대의()의 연원으로 추앙하면서 도통을 직의 심법을 기준으로 삼아 공자·맹자·주자에서 송자로 이어가고 있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1977년 사문학회에서 ≪송자대전≫ 7책 및 ≪송자서≫ 1책을 영인, 간행한 바 있다. 송자대전[宋子大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