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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 대청동 사성리 애향탑(東區 大淸洞 沙城里 愛鄕塔) 본문
아 ! 그리운 내 고향 주안 모래재.
조상 대대로 살아왔고 포근한 어버이 품속에서 살아온 애정이 서려있는 이 곳.
잔뼈가 굵게 자란 이 땅 사성리 어이 꿈엔들 잊으리오 자나깨나 뿌리깊은 맥이 어린 우리의 고향 국가 백년대계의 사업으로 대청댐이 완공된 1980년 담수되어 살던 집 문전옥답 물속에 잠겨 동서남북 뿔뿔히 눈물을 머금고 흩어졌다. 당시의 가구수는 110호 인구수는 800여명 전답을 문앞뜰 방채뜰 사창뜰 대실뜰 광할한 옥토를 경작했다. 전설에 의하면 마을터가 좋아서 장래 큰인물이 난다고 하였던 모래재 동쪽으로 춘두막 남쪽으로 대실고개 북쪽으로 질마고개 이땅이 삼천석의 부자가 난것도 효자효부가 나왔던 것도 지형학상 천하길지였기 때문일 것이다.즐거우나 괴로우나 사랑으로서 아기자기한 정을 주고 받았던 우리들이 아니였던가 이렇게 좋은 고향을 나라를 위해 뿔뿔히 헤어진 지 어언 15년아! 실향민은 통일이 되면 고향을 찾아갈 수 있겠지만 우리 수몰민은 영원히 찾아가지 못할 수중이 아니던가?조상의 얼과 고향을 그리워 하는 마음에서 이 탑을 세우니 앞으로 후손들이여 조상들의 애환이 서린 이 아름다운 터전을 길이 보전해 줄것을 바라며 그대 들의 앞날에 찬란한 영광이 있기를 바란다. 1996년 1월 일 원주민 일동.
사성리(沙城里)가 포함되여 있는 대청동은 대전광역시 동구의 동쪽과 북쪽에 위치한 동이다. 대청댐 건설 이전까지 대전 지역의 중요한 상수원이었던 세천수원지(1934년 축조)와 대청호가 있다. 추동 · 비룡동 · 직동 · 세천동 등 15개 법정동이 속해 있다. 충북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대청호를 끼고 있어 지명이 유래되었다. 본래 조선 시대 회덕현 동면과 일도면에 속했던 지역으로 『여지도서』에 추동리 · 주산리 · 비룡동리 등이, 『호구총수』에는 상추동리 · 하추동리 · 세천리 · 주산리 · 비룡동리 · 직동리 · 마산리 등이 확인된다. 1914년 대전군 동면에 속하게 된 마산리 · 효평리 · 용계리 · 내탑리 등 15개 동리는 현재의 대청동에 속하는 15개 법정동과 정확히 일치한다. 1935년 대덕군에 편입되었다가 1989년 직할시 승격으로 대덕군 동면 전역이 동구에 편입됨에 따라 추동과 세천동으로 분할, 통합되었다. 이후 다시 1998년 과소 동의 통합으로 두 개의 행정동을 합쳐 대청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는데, 예전 마을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은 1980년 대청댐 건설로 인해 상당 부분 수몰되었다.
추동은 마을 주변에 가래나무가 많이 있어 가래울 또는 추동이라 불렀으며, 내탑동은 마을 입구에 탑이 있었으므로 탑산이라 불렀던 곳이다. 마산동은 말처럼 생긴 산 아래 마을이 있다 하여 그렇게 불렀다 전한다. 고려 말~조선 초에 매년 이 지역의 토성이었던 회덕 황씨 가문에서 삼남지방을 여행하는 나그네들에게 적선을 베풀던 미륵원(彌勒院)이라는 일종의 개인 역원이 있었던 곳이기도 했다. 비룡동은 용이 승천했다는 돌이 있으므로 미름들이라 하던 것이 비름들 · 비룡동으로 변했다고 하고, 세천동은 마을에 작은 개울이 여러 개 있어 잔개울 또는 세천이라 불렸다 하며, 용계동은 옛날 냇가에 용이 살았다는 연못이 있어 용지말 · 용계말로 불렸다고 한다. 주촌동(舟村洞)은 고해산 아래 있는 마을이 풍수 형국상 배 모양처럼 생긴 데서 유래했다 전하며, 직동은 마을 뒤 노고성에서 백제와 신라군이 치열한 전투를 하여 피가 내를 이루었으므로 피골 또는 직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대청동 [大淸洞, Daecheong-dong] (한국지명유래집 충청편 지명, 2010. 2., 국토지리정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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