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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어암리 삼년산성(報恩邑 漁岩里 三年山城)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보은읍 어암리 삼년산성(報恩邑 漁岩里 三年山城)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9. 18. 12:15


충청북도 보은군 보은읍 어암리에 있는 신라시대의 산성.

사적 제235호. 지정면적 226,866㎡, 둘레 1,680m. 오정산()의 능선을 따라 문지() 4개소, 옹성() 7개소, 우물터 5개소와 교란된 수구지() 등의 시설이 갖추어져 있다. 이 성은 470년(자비왕 13)에 축조되었으며, 486년(소지왕 8)에 개축되었다.

그리고 삼국시대는 삼년군()·삼년산군()으로 불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으로 불린 듯하나 《삼국사기》에는 성을 쌓는 데 3년이 걸렸기 때문에 삼년산성이라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오항산성()으로, 《동국여지승람》·《충청도읍지》에는 오정산성으로 기록되어 있다.이 산성은 포곡형으로 구들장처럼 납작한 자연석을 이용하여 자 모양으로, 한 켜는 가로쌓기, 한 켜는 세로쌓기로 축조하여 성벽이 견고하다. 석재는 대개 장방형이다. 성벽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축조하였기 때문에 일정하지 않아 13∼20m에 달하며 거의 수직으로 쌓여 있다.

이처럼 성벽이 높고 크기 때문에 그 하중도 막대하며, 성벽 모퉁이의 하중이 큰 부분에는 기초를 견고하게 하기 위하여 4중의 계단식으로 쌓았다.




동쪽과 서쪽의 성벽은 안으로 흙을 다져서 쌓았고, 바깥쪽은 돌로 쌓는 내탁외축()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남쪽과 북쪽은 모두 석재를 이용하여 축조하는 내외협축()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문지는 동서남북의 네 곳에 있으나 지형상 동문과 서문을 많이 이용한 듯하며, 그 너비는 대개 4.5m에 달한다. 수구는 지형상 가장 낮은 서쪽 방향으로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동쪽에는 지상에서 약 1m 되는 성벽부분에 65×45㎝의 5각형 수문이 남아 있다.

한편, 7곳의 옹성은 대개 둘레가 25m, 높이 8.3m로서 지형상 적의 접근이 쉬운 능선과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하였다. 또한, 우물터는 아미지()라는 연못을 비롯하여 5곳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으며, 이 주위의 암벽에는 옥필()·유사암()·아미지 등의 글씨가 오목새김되어 있는데 김생()의 필체로 전한다.1980년 7월 22일 호우로 인하여 서문지 부분이 무너져내리고 유구()가 드러나 발굴한 결과 성문에 사용했던 신방석()과 주춧돌을 찾을 수 있었다.





또, 성문은 신라의 상대()와 하대()에 축조되었는데 상대 문지의 문지방석()에 수레바퀴 자국이 남아 있는 것을 분석한 결과, 중심거리가 1.66m에 달하는 큰 수레가 다녔던 것으로 보인다. 1983년의 발굴 결과 삼국시대에서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토기조각과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이 성의 이용 편년을 입증해주고 있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대전·청주·상주·영동으로 연결되는 요지로서, 신라는 이 지역의 확보를 토대로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김헌창()의 난 때 거점지로도 이용되었으며, 918년(태조 1) 왕건()이 이곳을 직접 공격하다가 실패하기도 하였고, 임진왜란 때도 이용된 기록이 있다. [三年山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