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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 이원리 홍우선공적비(內北面 泥院里 洪雨先功績碑)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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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 이원리 홍우선공적비(內北面 泥院里 洪雨先功績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9. 5. 17:33

 

 

 

 

내북면 이원리에 있는 구한말 홍우선의 공적비입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의병아장홍공우선공적비(義兵亞將洪公雨先功績碑)이라고 음기되어 있으며 좌우 후면에는 홍우선의 행적이 기술되어 있다. 도원리에는 세종의 태를 묻었다고 전해지는 태봉산이 있으며, 옹기 점이 있었다 한다. 마을유래비에는 ‘의병장 한봉수의 아장으로 활동한 홍우선 선생의 의와 충의 마을’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홍우선 의사는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의병을 모아 한봉수 의병부대의 아장이 되어 청원, 진천, 괴산, 평택, 문경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고향 도원리에서 서거했다. 1973년 내북면 애향동지회에서 홍우선 선생을 기리는 공적비를 세웠다

 

홍우선 선생의 공적비입니다.

 

 

 

홍우선은 서기 1884년 8월 22일 본면 도원리에서 출생하였는데 젊어서 부터 강개한 뜻을 품었고 용력이 또한 사람에 뛰어 났었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이루어지자 공은 통분함을 참지 못하여 수십명의 의병을 모아 청주 한봉수대장에 그 아장이 되어 도촌방방곡곡에서 불철주야 왜적을 무찌르는데 분투 하였으니 그 실례로서 1907년 진천군 문백에서 왜 헌병대위 도각선치를 사살한것을 비롯하여 같은해 괴산군 유목리 부근에서 왜병 10여명 전멸과 다수 무기를 노획 청주 양성면 추정리에서 또한 적 10여명 사살과 무기노획 북일면 세교리에서 5명 사살 문의면 성남리에서 20여명 사살 또 다시 초정리에서 적수송대를 급습 물자및 현금을 탈취하여 주민들에게 분급하는 한편 아군수용에 충당하였으며 내원면 옥화대에서 8명 사살과 무기노획 또 그 다음해 청주 전의 본천 평택 여주 홍성 각지에서의 격전 그리고 문경에서의 최대승첩등 전후 불가승기의 그 전투는 의병전사사실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웠던 것이다.그러나 다만 죽창대 총포 또 중과부적의 형세로 도저히 더 전투를 지속하기 어렵게 되매 잠시 속리산에 후퇴하여 다음기회를 기다리고 있다가 1936년 6월 22일 고향인 도원리에서 비원을 안은채 서거하고 말았으니 아 슬프다 이것이야 말로 장사영웅 누만금의 원통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큰집이 기울어 지는데 한개의 나무로는 지탱하지 못함과 같이 아무리 공의 전륜이 용력이 불타는 충의심이라 할지라도 힘의 부족과 시운의 불리에는 어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빛나는 충훈과 불명의 무훈만이 길이 천추에 남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또 이 강토의 수호신이 되실것을 확신하며 본회로서 뒤늦게 나마 자그마한 돌에다가 그 위적을 새기는 바이다 강한 바람앞에 센풀을 알고 어지러운 때에 충신을 보게 된다는 옛말을 우리는 새삼 공에게서 절실히 느끼고 있는 것이다. 서기 1973년 8월 18일 내북애향동지회 세움. 글 이병한 글씨 김견구

 

 

진천 문백에 있는 일본헌병 도각선치의 비석입니다.(당시 일본군이 세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