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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 이원리 의사석성국묘지(內北面 泥院里 義士石成國墓地) 본문
1963년 대통령 표창 수여 이후 내북면애향동지회는 1968년 묘비를 건립했고 1991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으며 매년 내북면애향동지회 주관으로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이원리는 조선시대 행인의 편의를 도와 주던 이원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마을 이랍니다.
자연부락으로 곰골, 다락골, 도쟁이, 백운동이 있으며. 7~80년대 "돌기와" 생산지로 전국적으로 유명했으며, 전국에서 많은 광부들이 모여 들어 부를 누리던 마을 이기도 합니다.
해방이후 내북면의 소재지이었으나, 1984년 읍면 및 마을의 행정구역이 조정되면서 소재지가 지금의 창리로 옮겨 갔다.
석창문(1886.7.6~1908.9.10)내북 이원 출신으로 키가 적으나 매우 용맹한성품의 소유자였다.어렸을때 가세가 빈한하여 상업에 종사하였다. 1907년 군대해산이후속리산 중에 의진이 형성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생업을 버리고 한봉수의 참모장이 되었다.그는 출전할때마다 많은 덕을 사살하였다.일병들이 그를사로잡으려 하였으나 출입할때 마다 병기로 무장하고 있어서 어찌 할수가 없었다. 1908년 5월 의병장 한봉수 김규환과 함께 약 40명을 인솔하고 청주 산외일면 초정동에서 일인기병 2명이 우편물을 호위하고 오는것을 확인하고좌우의 산기슭에 매복하였다가 이들이 오는것을 기다려 석창문이 선두의 일본병을저격하여 사살하고 접전중 나마지 일인이 퇴각하자우편물과 현금 이천여원을 탈취하여 군자금으로 사용하였다.
그 해 봄에 석창문이 적정을 탐색하기위하여 홀로 의진을 떠나 오대산에 이르렀을때 적 수십명에게 창졸간에 포위되었다. 대적하기 어려운 상황이라틈을 보아 도주하였으나 적의 추격을 받아 주머니칼을 꺼내들고 끝까지 저항하다가 체포당하였다.적은 그를 심문하여 의진의 근거지를 알아내고자 하였다.이에 석창문은 "이미 사로잡혔으니내가 죽을지언정 남을 끌어드리겠느냐?"하며 스스로 혀를 깨물어 자백하지 않았다.적이 보은군으로 그를 끌어내려서 살해하였다. 일설에는 스스로 고환을 끊어 자결하였다고 전하기도 하는데 순국당시 그의 나이 24세에 불과했다.시신이 되어 집으로 돌아오자 온 집안이 놀라고 슬퍼하였으나 그의 처인 성산이씨는 태연하게 에로서 장례를 지내었다.장레를 치르고 사흘후 부인마저 20세의 나이로 목을 매어 자결하였다.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1963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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