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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은읍 학림리 율봉찰방허직영세불망비(報恩邑 鶴林里 栗峯察防許稷永世不忘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보은읍 학림리 율봉찰방허직영세불망비(報恩邑 鶴林里 栗峯察防許稷永世不忘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7. 9. 1. 12:58

 

 

보은읍 학림2리 마을회관 뒷편에 자리하고 있는 허직의 영세불망비이다.비의 전면에는 음각으로 행율봉찰방허후직영세불망비(行栗奉察訪許侯稷永世不忘碑) 라고 새겨져 있다.비의 하단부분이 파손되여 접합하였다.비의 관리상태는 열악하며  관리가 필요하다.비석의 크기는 80*37*16이다.찰방 허직은 조선조 고종(高宗) 대에 율봉도찰방(栗峰道察訪)을 지냈습니다

 

 

 

농가의 담벼락에 붙어 있습니다.

비석이 가까이 붙어있으니 뒷면을 볼수가 어렵습니다.

 

찰방은 고려 때는 지방의 역(驛)을 담당한 관리는 시대에 따라 명칭이 조금씩 바뀌었다. 초기에는 제도관(諸道官) 또는 역순관(驛巡官)이 파견되었으나 현종 때는 제도관역사(諸道館驛使)로 개칭되었다. 1272년(원종 13)에는 전국에 정역소복별감(程驛蘇復別監)을 파견하였다.

원나라 간섭기에는 원나라 참적제도(站赤制度)의 영향을 받아 포마차자색(舖馬箚子色)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다루가치(達魯花赤)와 탈탈화손(脫脫和孫)을 파견해 우역사무를 감독하게 함으로써 역행정의 자주권마저 박탈당하였다. 원나라가 축출되자 1390년(공양왕 2) 역로 회복을 위한 노력의 하나로 조준(趙浚) 등이 주장해 역승(驛丞) 설치문제가 대두하였다.

조선 초기에는 역승과 정역찰방(程驛察訪)이 함께 설치되었다. 정역찰방은 1402년(태종 2) 경기지방의 역로를 고찰하려고 파견된 것이다. 1433년(세종 15) 이전까지도 전라·경상도를 제외한 전국의 각 도에 1, 2인이 파견되었다. 정역찰방의 임무가 역승의 잘잘못을 규찰하거나 주군(州郡)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고통을 살펴 엄히 다스리는 것이라고 한 사실에서 정역찰방이 곧 찰방의 전신(前身)으로 추측된다.

1457년(세조 3) 7월에 최초로 전국의 역승 일체를 혁파하고 찰방으로 대치하였다. 이러한 한 조처는 서리거관자(書吏去官者)로 임명된 역승이 사사로이 이익을 도모하고 백성(吏民)을 침해할 뿐만 아니라, 역승의 관품이 높지 않다 하여 사신왕래자의 작폐가 심하다고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혁이 있은 뒤 1462년 1월에는 찰방이 관할하는 역이 많으므로 찰방도(察訪道)에 역승 1인을 더 설치하자는 논의에 따라 역로를 크게 개편하였다. 이 해 8월 충청·전라도에 찰방과 역승 각 3인씩, 경상도에 찰방과 역승 각 5인씩, 강원도에 각 2인씩, 황해도에 찰방만 2인씩 두게 되었다.

조선왕조의 기본법전인 ≪경국대전≫에는 경기·충청·전라도에 각 3인씩, 경상도에 찰방 5인과 역승 6인, 강원도에 각 2인씩, 황해도에 찰방 2인과 역승 1인, 영안도에 찰방 3인, 평안도에 찰방 2인으로 법제화되었다. 1535년(중종 30)에는 역승이 완전히 폐지되고 찰방체제로 전환되었다.

≪속대전≫에서는 이미 역승을 혁파해 찰방으로 대치했으므로 찰방 수가 크게 늘어나 경기도에 6인, 충청도에 5인, 경상도에 11인, 전라도에 6인, 황해도에 3인, 강원도에 4인, 평안도에 2인이었다. ≪대전회통≫에서는 그 수에 변함이 없다.

찰방은 역리(驛吏)를 포함한 역민의 관리, 역마 보급, 사신 접대 등을 총괄하는 역정(驛政)의 최고책임자였다. 또한 유사시에 북방지역에서는 합배(合排 : 함경·평안도 연안에 설치한 군사적 성격의 역촌)를 순행하면서 부방(赴防)의 임무도 수행하였다.

행정면에서는 대간(臺諫)이나 정랑직(正郎職)에 있는 명망 있는 문신을 차출해 지방 주현에 파견하여, 수령의 탐학과 민간의 질병까지도 상세히 고찰하게 함으로써 민생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찰방 [察訪]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