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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동 임경업 묘비(楓洞 林慶業 墓碑) 본문
충주시 풍동에 위치한 임경업 장군의 묘비입니다.임경업은 조선 후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무신입니다.
본관 평택(平澤). 자는 영백(英伯), 호는 고송(孤松), 증조할아버지는 사헌부감찰을 역임한 임유명(林有名), 할아버지는 호조참판을 역임한 임덕윤(林德胤), 아버지는 영중추부사를 역임한 임황(林篁), 어머니는 파평윤씨이다.
1594년(선조 27)년 충주에서 태어난 임경업(林慶業)은 1618년(광해군 10) 동생 임사업(林嗣業)과 함께 무과에 급제하였다. 함경도 갑산으로 추방(秋防: 무과 급제자가 정식으로 임관되기 전 의무적으로 변방에서 근무하는 제도)을 나갔다가 1620년(광해군 12) 함경도 삼수의 소농보권관으로부임하여 군량과 병장기를 구비하는데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오르고, 1622년(광해군 14)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다.
인조반정 공신인 김류(金瑬)의 군관으로 있다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형 임승업(林承業), 동생 임준업(林俊業)과 함께 선봉장 정충신(鄭忠信) 휘하에 들어가 안현전투에서 공을 세워 원종공신 1등에 올랐다. 1625년 중추원부사겸우림위장과 전라도 여수 돌산도의 방답첨사(防踏僉使)를 거쳐, 1626년 전라도 낙안군수로 부임하였다.
1628년 체찰부별장, 1629(인조 7) 용양위부호군, 1630(인조 8) 평양중군을 거쳐 1631년(인조 9) 방어사에 임명되어 정묘호란으로 퇴락한 검산산성·용골산성·운암산성·능한산성을 수축하였다. 정묘호란 이후 약화된 군사력을 이유로 청천강 이북 지역을 포기하려는 조정의 움직임에 대한 청북민의 반대운동을 사주했다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으로 한때 구금되었으나 곧 석방되어 정주목사로 부임하였다.
1633년(인조 11) 2월 청북방어사겸영변부사에 임명되어 의주의 백마산성을 수축하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또한 장자도에 정박하고 있던 명나라의 반란군을 공격하여 명나라 황제로부터 총병(摠兵)에 임명되고 많은 하사품을 받았다. 이때부터 임경업의 이름이 명나라에서도 크게 알려지게 되었다.
1634년(인조 11) 의주부윤겸청북방어사 재직 중 밀수 혐의로 파직되었으나 도원수 김자점의 상소로 복직하고, 압록강 맞은편의 송골산과 봉황산에 봉화대를 설치하는 등 국방 태세를 강화하였다. 1636년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청나라 군대는 임경업이 백마산성을 굳게 수비하고 있음을 알고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10여 일 만에 한성에 육박하였고, 1637년 1월 결국 조선은 청나라에 굴복하고 말았다. 백마산성을 지키고 있던 의주부윤 임경업은 본국으로 돌아가는 청나라 태종의 조카 요퇴(要魋)의 정예 기병 300기를 압록강에서 격퇴하고 잡혀가던 조선 백성 120명과 말 60여 필을 빼앗는 전과를 올렸다.
1637년 청나라가 가도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를 공격할 때 청나라의 요청으로 파견되어 공을 세움으로써 심양에 가서 청나라 황제에게 포상을 받았다. 이후 의주로 돌아와 피폐해진 의주의 물적 자원을 확충하기 위해서 상인을 보내 심양에서 밀매를 시도하다가 발각되어 평안도 철산으로 유배되었다.
1638년(인조 16) 8월 명나라의 금주위(錦州衛)를 공격하려는 청나라의 요청으로 파견된 조선의 병력이 제때에 집결지에 도착하기 어려워지자 청나라의 문책을 두려워한 조선 조정은 임경업을 복권시켜 조방장을 삼아 심양에 가서 병력 동원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하게 하였다. 임경업은 300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심양으로 가서 병력 동원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이 공로로 인조로부터 말 한필을 하사받고 의주부윤으로 복귀하였다가 1638년 9월 평안병사에 임명되었다.
1639년 11월 명나라의 근거지인 금주위를 공격하기 위한 청나라의 군사 지원 요청으로 주사상장(舟師上將)에 임명되어 수군을 이끌고 1640년 4월 안주를 출발하여 금주위로 향하였다. 사전에 임경업은 최명길과 밀의하여 승려 독보(獨步)를 등주에 있는 명나라 수군도독 홍승주(洪承疇)에게 보내어 이러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임경업이 이끄는 수군은 명나라 수군과의 전투에서 힘써 싸우지 않았고, 임경업의 의도를 눈치 챈 청나라는 조선 조정에 임경업을 처벌할 것을 요청했으나 조정은 귀국한 임경업을 일단 파직시켰다가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임명하였다.
1642년(인조 20) 청나라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청나라에 투항한 명나라 수군도독 홍승주가 임경업이 명나라와 밀통한 사실을 알렸다. 또한 명나라와 밀거래를 하다 청나라에 발각된 선천부사 이계가 임경업이 승려 독보를 명나라에 보낸 사실을 실토함으로써 임경업이 청나라에 거짓 협조한 사실이 드러났다.
결국 임경업은 체포되었으나 청나라로 압송되는 도중 황해도 금천군 금교역에서 탈출하여 명나라로 망명하였다. 1643년(인조 21) 명나라 총병 마등고(馬騰高)의 휘하에 소속되어 평로장군으로 4만의 병사를 이끌게 되었다. 그러나 명나라의 북경과 남경이 청나라에게 함락되자 마등고는 청나라에 항복하였고, 1644년(인조 22) 3월 조선에서도 심기원의 옥사가 일어나 임경업이 역모에 연루된 것으로 의심되면서 임경업은 갈 곳을 잃게 되었다.
결국 1645년 정월 부하의 밀고로 청나라 병사에게 체포되어 북경으로 압송되고 18개월 동안 감옥에 구금되었다. 1646년 6월 조선 조정의 요청으로 한성으로 압송되어 심기원과의 역모 공모에 관하여 추국을 받다가 1646년 6월 20일 모진 매를 이기지 못하고 생을 마감했다.
임경업은 충신이요 걸출한 무장이었지만 철저한 친명반청파로 당시의 국제 정세에 어두운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임경업이 나라와 백성에 두 마음을 품지 않은 진정한 애국지사임은 주지의 사실이며, 후세 사람들에게 병자호란의 아픈 기억과 함께 청나라가 두려워했던 유일한 조선의 명장으로써 추앙받고 있다. 임경업은 두 자루의 단검을 얻고서 용천검, 추련검이라 이름하고 「용천검 추련검」이란 칠언절구를 각각의 단검에 새겨 넣었는데, 임경업의 대장부로서의 기질과 우국충절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다.
정묘호란 후 의주부윤겸청북방어사로 있으면서 1634년(인조 12) 인조에게 올린 상소와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 군대가 백마산성을 우회하여 한성으로 직행했을 때 평안병사 유림에게 보낸 편지가 전해진다. 유림에게 보낸 편지는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침략한 틈을 노려 청나라의 수도인 심양을 공격하면 청나라가 조선에서 철군할 것이므로 심양을 공략하기 위한 병력 5천 명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충주 임경업 묘소는 충청북도 충주시 풍동 산 45-1에 있고, 충청북도 기념물 제67호로 지정되어 있다.
1677년(숙종 23) 임경업의 관직을 회복시키고 충주 임충민공 충렬사를 건립해 임경업을 배향했다. 1727년(영조 3) 충렬사에 사액을 내리고, 1738년(영조 14) 임경업의 후손을 관직에 등용시켰다. 1791년(정조 11) 정조가 서문을 써서 규장각 관원 김희(金熹)에게 『임경업실기(林慶業實紀)』를 편찬하게 하였고, 충렬사에 어제달천충렬사비(御製達川忠烈祠碑)를 건립하고 정조가 비문을 지었다.
송시열은 임경업의 행장을 읽고 감격하여 전기를 지었고, 숙종 때 이조참판을 역임했던 이선(李選)이 『충민공전(忠愍公傳)』을 저술했다. 영조 대에 형조판서를 역임한 황경원(黃景源)이 『황조배신전(皇朝陪臣傳)』을, 구계(龜溪) 백봉석(百鳳奭)이 『대명충의임공전(大明忠義林公傳)』을 저술했다.
임경업이 배향된 사당은 충주시 단월동의 임충민공 충렬사, 충주시 살미면 세성리 별묘(別廟), 평안북도 의주군 현충사, 평안북도 선천군 충민사, 전라남도 순천시 충민사, 인천광역시 연평도 충민사 등이다. 시호는 충민(忠愍)이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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