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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읍 교동리 김규흥선생고가(沃川邑 校洞里 金圭興先生古家) 본문
범재 김규흥은 청풍김씨 이십삼세손으로 휘는 규흥(奎興)이고 자는 기현(起賢)이며, 호는 범재(凡齋)이다. 1872년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선공감 감역이던 명성(命性)이며, 모친은 영일정씨 해수의 따님이다. 공은 삼남매중 장남이었으며, 서기 1760년도에 건조된 유서 깊은 한옥에서 성장했다. 집의 이름은 문향헌(文香軒)이다. 범재공의 5대조인 정언 김치신이 그의 아호를 따 건립한 것인데 원래 와가 85칸과 초가 12칸으로 된 대옥이었으나 현재 일부가 보존되어 춘추민속관이란 이름으로 전통 한옥체험업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김규흥이 15세 되던 1886년에 집안의 기둥이었던 조부가 별세하고 평소 병약하던 부친마저 1891년 40세를 일기로 작고하자 김규흥은 어린나이에 불구하고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김규흥은 평생을 통하여 장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집안은 그의 모친 정부인과 동생에게 맡기고, 가세가 기운 상태였지만 경성에 계속 머물면서 동지들을 사귀는데 더욱 힘썼다.
그는 당시 선진화되고 있는 일본을 방문하여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여러 방면의 문물을 살피기도 하였다. 특히 국민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고향인 옥천에 사재를 출연하여 진명(창명)학교를 설립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 무렵 김규흥은 윤치호가 회장으로 있는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나라를 개화하는데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대한자강회는 장지연, 박은식, 양기탁 등 개화파 인사들과의 교분을 맺는 통로이기도 했다. 김규흥은 참봉이란 보잘것없는 벼슬에 머물렀지만, 시(詩)의 황현(黃玹)과 문(文)의 이건창(李建昌)과 더불어 한문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가로 불렸으며, 역사서술에도 힘을 기울였던 창강 김택영이 인정한 재야 역사가로 문명을 날렸다.
조선말기, 고종은 당시 우리나라 외채 3천만 원의 3배 정도 되는 9천만 원이란 엄청난 금액을 비자금으로 조성하여 상해 소재 ‘아청은행’에 입금해둔 모양인데, 고종은 이 비자금의 일부를 그가 총애하는 이 상궁에게 권한을 주고 일부는 김규흥 등에게 조칙을 주어 상해에 무관학교를 설립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규흥 일행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됨으로서 그 돈의 향방이 일본통감부 또는 조선총독에게로 이관될 뻔했지만, 러일전쟁의 여파로 은행이 파산하게 되자 모든 것이 만사휴의가 되었던 사정을 하와이 교민들이 발행한 국민보란 신문은 이야기하고 있다. 김규흥이 고종의 비자금 관리와 회수를 위한 조칙을 받았다는 것은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신하의 한 명이었음을 증명한다. 김규흥이 이러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은 민영환과의 교우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의 성품은 평소 벗들과 사귀기를 즐겨하였다고 한다.
김규흥은 조칙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뒤에도 상당기간 일제의 의해 거주 제한을 당하다가 1908년 초 중국으로 망명한다. 당시 대부분의 우국지사들이 만주나 연해주를 망명지로 선택했지만 김규흥은 망명지로 광동을 선택한다. 김규흥의 망명은 독립운동사에 3가지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첫째, 공화주의의 정착을 들 수 있다. 둘째, 중국혁명지사들과의 유대관계이다. 셋째, 상해가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이 되게 한 점이다.
김규흥은 1908년 망명 이후 1936년 작고할 때 까지 단 한 번도 일본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더욱이 3?1운동, 의열투쟁, 은행설립, 언론사 설립, 둔전제 실행 등 독립운동의 획을 긋는 주요한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하면서도 일경의 수배 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물론 김규흥 본인도 조심스레 처신했겠지만, 김규흥의 정체를 알고 있는 주위 독립지사들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려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김규흥(金奎興 : 1892~1936)
범재 김규흥은 청풍김씨 이십삼세손으로 휘는 규흥(奎興)이고 자는 기현(起賢)이며, 호는 범재(凡齋)이다.1872년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선공감 감역이던 명성(命性)이며, 모친은 영일정씨 해수의 따님이다. 공은 삼남매중 장남이었으며, 서기 1760년도에 건조된 유서 깊은 한옥에서 성장했다. 집의 이름은 문향헌(文香軒)이다. 범재공의 5대조인 정언 김치신이 그의 아호를 따 건립한 것인데 원래 와가 85칸과 초가 12칸으로 된 대옥이었으나 현재 일부가 보존되어 춘추민속관이란 이름으로 전통 한옥체험업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범재 김규흥은 청풍김씨 이십삼세손으로 휘는 규흥(奎興)이고 자는 기현(起賢)이며, 호는 범재(凡齋)이다. 1872년 옥천군 옥천읍 문정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선공감 감역이던 명성(命性)이며, 모친은 영일정씨 해수의 따님이다. 공은 삼남매중 장남이었으며, 서기 1760년도에 건조된 유서 깊은 한옥에서 성장했다. 집의 이름은 문향헌(文香軒)이다. 범재공의 5대조인 정언 김치신이 그의 아호를 따 건립한 것인데 원래 와가 85칸과 초가 12칸으로 된 대옥이었으나 현재 일부가 보존되어 춘추민속관이란 이름으로 전통 한옥체험업의 장소로 활용하고 있다.
김규흥이 15세 되던 1886년에 집안의 기둥이었던 조부가 별세하고 평소 병약하던 부친마저 1891년 40세를 일기로 작고하자 김규흥은 어린나이에 불구하고 졸지에 집안의 가장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김규흥은 평생을 통하여 장남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다. 집안은 그의 모친 정부인과 동생에게 맡기고, 가세가 기운 상태였지만 경성에 계속 머물면서 동지들을 사귀는데 더욱 힘썼다.
그는 당시 선진화되고 있는 일본을 방문하여 정치/경제/문화/군사 등 여러 방면의 문물을 살피기도 하였다. 특히 국민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여 고향인 옥천에 사재를 출연하여 진명(창명)학교를 설립하는데 힘을 쏟았다. 이 무렵 김규흥은 윤치호가 회장으로 있는 대한자강회 회원으로 활동하며 나라를 개화하는데 많은 관심을 표명했다. 대한자강회는 장지연, 박은식, 양기탁 등 개화파 인사들과의 교분을 맺는 통로이기도 했다. 김규흥은 참봉이란 보잘것없는 벼슬에 머물렀지만, 시(詩)의 황현(黃玹)과 문(文)의 이건창(李建昌)과 더불어 한문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대가로 불렸으며, 역사서술에도 힘을 기울였던 창강 김택영이 인정한 재야 역사가로 문명을 날렸다.
조선말기, 고종은 당시 우리나라 외채 3천만 원의 3배 정도 되는 9천만 원이란 엄청난 금액을 비자금으로 조성하여 상해 소재 ‘아청은행’에 입금해둔 모양인데, 고종은 이 비자금의 일부를 그가 총애하는 이 상궁에게 권한을 주고 일부는 김규흥 등에게 조칙을 주어 상해에 무관학교를 설립케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규흥 일행이 일제 헌병대에 체포됨으로서 그 돈의 향방이 일본통감부 또는 조선총독에게로 이관될 뻔했지만, 러일전쟁의 여파로 은행이 파산하게 되자 모든 것이 만사휴의가 되었던 사정을 하와이 교민들이 발행한 국민보란 신문은 이야기하고 있다. 김규흥이 고종의 비자금 관리와 회수를 위한 조칙을 받았다는 것은 고종이 가장 신뢰했던 신하의 한 명이었음을 증명한다. 김규흥이 이러한 위치에 서게 된 것은 민영환과의 교우가 상당한 영향력을 끼친 것으로 짐작되는데 그의 성품은 평소 벗들과 사귀기를 즐겨하였다고 한다.
김규흥은 조칙사건으로 옥고를 치르고 난 뒤에도 상당기간 일제의 의해 거주 제한을 당하다가 1908년 초 중국으로 망명한다. 당시 대부분의 우국지사들이 만주나 연해주를 망명지로 선택했지만 김규흥은 망명지로 광동을 선택한다. 김규흥의 망명은 독립운동사에 3가지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첫째, 공화주의의 정착을 들 수 있다. 둘째, 중국혁명지사들과의 유대관계이다. 셋째, 상해가 독립운동의 중심지 역할이 되게 한 점이다.
김규흥은 1908년 망명 이후 1936년 작고할 때 까지 단 한 번도 일본경찰에 체포되지 않았다. 30년 가까이 독립운동을 하면서 더욱이 3‧1운동, 의열투쟁, 은행설립, 언론사 설립, 둔전제 실행 등 독립운동의 획을 긋는 주요한 투쟁의 배후 역할을 하면서도 일경의 수배 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일임에 틀림없다. 물론 김규흥 본인도 조심스레 처신했겠지만, 김규흥의 정체를 알고 있는 주위 독립지사들이 그를 보호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알려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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