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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이면 사동리 안심사 대웅전(南二面 寺洞里 安心寺 大雄殿) 본문
충청북도 청주시 서원구 남이면 사동길(사동리) 안심사에 있는 조선시대 불전입니다.
보물 제664호이다. 안심사는 속리산 법주사에 소속된 작은 사찰로서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대웅전은 안심사의 주불전으로 언제 창건되었는지 알 수 없다. 다만 1979년 대웅전을 해체수리하면서 「충청좌도청주남령구룡산안심사중수기(忠淸左道淸州南嶺九龍山安心寺重修記)」가 발견되어 1606년에 중수하였음이 밝혀졌다. 대웅전은 본래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팔작집이었다. 그러나 여러 차례 중수하면서 측면이 3칸에서 2칸으로 줄어들었고 지붕도 팔작지붕에서 맞배지붕으로 바뀌었다. 내부에는 석가여래를 주불로 하여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봉안하고 있다.
안심사는 사적기(事蹟記)가 남아있지 않아 창건에 관한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안심사고적연대표(安心寺古蹟年代表)」에 따르면 775년(혜공왕 11)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하고, 1325년(충숙왕 12) 원명국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대웅전의 초창연대는 알 수 없으나 중수기를 볼 때 1606년(선조 39) 이전부터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1626년(인조 4)에는 송암대사(松庵大師)가 대웅전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1649년(인조 27)에 다시 중수하였고, 3년 후에는 영산회괘불탱(국보 제297호)을 조성하여 봉안하였다. 1672년(현종 13)에는 대웅전의 기와를 교체하고 지금의 영산전인 비로전을 창건하였다. 1761년(영조 37)에는 보전(寶殿)의 대들보를 보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보전이 대웅전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당시 공사는 상당히 큰 공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대웅전은 1816년(순조 16)에 다시 한 번 중창되었는데 이때 팔작지붕이 맞배지붕으로 개조되고 측면도 1칸이 줄어든 것으로 추정된다. 1842년(헌종 8)에는 또다시 중수가 있었고 1976년에는 기와를 교체하였다. 1979년에는 완전히 해체 보수하면서 구조적 안정성을 고려하여 배면 어칸 기둥의 상부 구조를 변경하였다. 이후에도 지붕과 석축 등 여러 차례 보수가 있었다.
안심사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자연석 허튼층쌓기한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본래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었으나 후대에 바뀐 것이다.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으며 그 위에 민흘림이 있는 원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내외 3출목 형식인데 주상포(柱上包)와 주간포(柱間包)의 모습이 약간 다르다. 주상포의 경우 초제공부터 3제공(諸工)까지는 바깥쪽 끝이 위로 살짝 치켜든 앙서형(仰舌形)이고, 4제공은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4제공 위에는 대들보의 보머리가 밖으로 빠져나온다. 건물 내부에서 1·2제공은 하단을 둥글게 깎은 교두형(翹頭形)이며 3·4제공은 보아지 형태로 초각(草刻)하였다. 주간포는 주상포와 유사하나 대들보 자리에 운공(雲工) 형태의 5제공을 끼워 넣었다. 건물 내부에서는 3제공까지 교두형으로 처리하고, 4·5제공은 연봉을 조각하였으며, 그 위에 봉두(鳳頭)를 조각한 부재를 끼웠다.
가구구조(架構構造)는 본래 1고주 5량 구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후대에 건물을 축소하면서 고주를 배면 어칸으로 옮기고 주심도리를 공포재 없이 직접 받도록 변경한 것으로 판단된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를 세워 종보와 중도리를 결구하였고 종보 위에는 판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쳤다.
안심사는 진입로의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선방(禪房)이 있고 오른쪽의 높은 단 위에 영산전이 서향하고 있다. 대웅전은 안쪽 깊숙한 곳에 남서향하고 있으며 대웅전의 왼쪽에는 산신각과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및 탑비(塔碑)가 있다.
정면 지붕은 서까래와 부연을 사용한 겹처마이고 배면 지붕은 서까래만 사용한 홑처마이다. 천장은 우물반자를 설치하였는데 2단으로 처리하였다. 불상 위에는 화려한 닫집을 설치하여 장엄하였다.
안심사 대웅전은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계 건물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정면 어칸 주상포의 힘차게 아래로 뻗은 3제공 수서(垂舌), 귀공포에서 출목이 교차되는 부분에 제공을 짜지 않은 간략한 수법, 내부와 외부의 출목 수가 같은 공포 구성 등에서 조선 초기 다포계 건물의 양식도 나타나고 있다.
또한 이 건물은 다포집임에도 불구하고 창방 위에 평방(平枋)을 사용하지 않고 공포를 배열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이외에도 가구수법을 보면, 배면 어칸의 주간포를 생략한 것, 맞배지붕임에도 불구하고 팔작지붕에서 보이는 충량(衝樑)이 설치된 것, 중도리 위에 덧도리를 놓고 긴 서까래를 이중으로 걸친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모두 후대에 건물이 축소되고 구조가 변경되면서 나타난 변화이다.
한편, 배면 고주 위에는 대들보를 받치는 보아지가 밖으로 길게 빠져나와 그 위에 운공(雲工)을 두어 외목도리를 받치고 있다. 이는 본래 수법이 아니며 1979년 보수하면서 구조의 안정성을 고려하여 보강한 것이다.
이 건물은 전체적으로 조선 중기 이후의 다포계 건축물의 특징을 지니고 있으나 부분적으로는 조선 초기의 수법도 간직하고 있다. 여러 차례 보수하면서 평면과 구조가 변경되었지만 당시의 건축수법을 적용하고 있어 다포계 건축물의 변화과정을 살펴 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조선 후기 사찰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불전의 규모가 축소되고 구조가 변경되는 과정도 잘 보여주고 있다.
청주 안심사 대웅전 [淸州安心寺大雄殿]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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