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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충동 홍재희 영세불망비(慕忠洞 洪在羲 永世不忘碑) 본문
모충동 모충사 경내로 오르는 계단옆에 자리하고 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숭정대부행병마절도사홍공재희영세불망비(崇政大夫行兵馬節度使洪公在羲永世不忘碑)라고 적혀있으며
비석의 뒷면에는 광서14년(1888년) 건립시기가 적혀있다.
홍재희는 조선 후기의 무신이다.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지냈고, 동학농민전쟁 때 정부군을 이끌었던 조선 말기의 무관이다.
본관은 남양(南陽)이며, 자는 성남(聖南), 호는 규산(圭珊)이다. 초명이 재희(在羲)이다.
1882년(고종 19) 임오군란(壬午軍亂)이 발발하였을 때 무예별감(武藝別監)으로 있었는데, 명성황후(明成皇后)를 궁궐에서 탈출시킨 공으로 중용되었다.
1887년에는 충청병마절도사로 청주병영의 군사력을 강화시켰다. 1893년 3월 동학교도들이 충청도 보은에서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내걸고
모였을 때, 장위영정령관(壯衛營正領官)으로 임명되어 장위영의 정예부대 600명을 이끌고 청주로 출동하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장위영 군사 800명을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해 5월 31일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 의하여 점거되자, 총공세를 취하지 않고
위협적인 포격만 가함으로써 되도록 회유하여 해산시키려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그리하여 전봉준(全琫準)이 제시한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임으로써 6월 11일 전주화약이 성립, 농민군은 유혈싸움 없이 철수하였다.
한편, 동학농민군이 전라도 일대를 석권하고 있을 무렵 영광에 출진하여 관군의 힘으로는 이를 진압하기 어렵다는 것을 판단하고, 국왕에게 직접 전황을
보고하고 청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도록 함으로써 청·일전쟁의 발발 원인이 되기도 하였지만, 동학농민군의 예봉을 꺾은 공으로 훈련대장으로 승진되었다.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훈련대장으로 광화문을 수비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전사하였다.
충청병마절도사로 청주병영의 군사력을 강화시켰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1888년에 의병 홍재희(洪在羲)선정비가 세워졌다. 군부대신에 추증되고, 충의공(忠毅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1900년에 이경직(李耕稙)과 함께 장충단에 제향되었다.
홍재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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