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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동면 쌍정리 이지걸묘비(孟洞面 雙呈里 李志傑墓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맹동면 쌍정리 이지걸묘비(孟洞面 雙呈里 李志傑墓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5. 15. 11:24

 

 

맹동면 쌍정2리 배미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문신인 이지걸의 묘비입니다.묘비를 바라보며 옆으로의 작은 야산에는 묘지도 자리하고 있습니다.비석의 상태는 양호합니다.묘비는 윤승이 글을 짓고 조상혜가 쓰고 최석정이 전(篆)해 1703년에 세웠으며 전체 높이는 310cm이다. 

 

 

 

 

 

 

 

 

 

 

 

 

 

 

 

 

 

 

 

 

 

 

 

 

 

 

 

 

 

 

 

 

 

 

 

 

 

 

 

 

 

 

이지걸의 묘갈명은 다음과 같다.

공(公)의 휘(諱)는 지걸(志傑)이요, 자(字)는 수부(秀夫)이며, 호(號)는 금호(琴湖)인데, 성주인星州人)이다. 상조(上祖) 이총언(李言)은 고려(高麗)의 개국 공신(開國功臣)이다. 그 뒤로 높은 벼슬이 대를 이었다. 아조(我朝)에 들어와서 소재(少宰) 이약동(李約東)은 덕행(德行)과 염백(廉白) 그리고 염퇴(恬退)로 이름이 났는데, 시호(諡號)는 평정(平靖)이다. 3대를 전하여 이석명(李碩明)은 군수(郡守)인데 바로 공의 고조(高祖)이며, 또한 청렴한 지조가 있어 사람들이 그를 청수(淸水)에 비교했다.

증조(曾祖)는 이희선(李喜善)인데 경행(經行)으로 동몽 교관(童蒙敎官)에 천거로 제수(除授)되었고, 조부(祖父) 이상급(李尙伋)은 병조 참지(兵曹參知)인데, 형(兄) 충숙공(忠肅公) 이상길(李尙吉)과 더불어 함께 직절(直節)이 있어서 일세(一世)에 중망(重望)이 있었다. 선고(先考) 이연(李堜)은 아름다운 자질이 있었으나 약령(弱齡)에 부모상을 당하여 슬픔을 못이기고 야위어서 죽었는데 후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되었고, 선비(先妣)는 가림 조씨(嘉林趙氏)와 전성 이씨(全城李氏)인데 함께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다. 이씨(李氏)는 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 이구준(李耈俊)의 딸이며 청강공(淸江公) 이제신(李濟臣)의 손녀인데, 숭정(崇禎) 임신년(壬申年, 1632년 인조 10년) 5월 6일에 공을 낳았다. 공은 3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계부(季父) 승지공(承旨公, 이인의 집에서 자랐다.

공은 아이적부터 총명하고 영특하며 글을 좋아해서, 번거롭게 일러주지 않아도 문예(文藝)가 일찍 이뤄져서 약관(弱冠)에 태학[上庠]에 올랐다. 정미년(丁未年, 1667년 현종 8년)에 모친상을 당하였다. 공이 이미 훌륭한 인망(人望)을 받고 있어서 과거 급제(科擧及第)는 스스로 구부려 주울 수 있다고 생각하여 반드시 고당(高堂)이 무양(無恙)할 적에 한번 기쁘게 해 드리려고 했는데, 끝내 이루지 못해서 마침내 종신토록 지극한 한으로 여겼다.

경신년(庚申年, 1680년 숙종 6년)에 의금부 도사(義禁府都事)에 제수(除授)되고 여섯 번 옮겨 네 관청을 거쳤고 공조 좌랑(工曹佐郞)에 올랐다. 계해년(癸亥年, 1683년 숙종 9년)에 고산 현감(高山縣監)에 제수되어 2년간 봉직하다 파직되어 돌아왔고, 정묘년(丁卯年, 1687년 숙종 13년) 봄에는 사복시 주부(司僕寺主簿)에, 가을에는 흡곡 현령(歙谷縣令)에 제수되었다가 공적인 격식(格式) 때문에 갈리고 다시 내자시 주부(內資寺主簿)가 되었다가 감찰(監察)로 옮겼으며, 또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전직(轉職)되었다.

무진년(戊辰年, 1688년 숙종 14년)에는 영덕 현령(盈德縣令)에 제수되고, 기사년(己巳年, 1689년 숙종 15년)에는 파직되어 체포(逮捕)되고 이듬해인 경오년(庚午年, 1690년 숙종 16년)에 재차 구속되어 신미년(辛未年, 1691년 숙종 17년)에는 곤양(昆陽)으로 귀양 갔다가 갑술년(甲戌年, 1694년 숙종 20년)에 사면되어 돌아왔다. 신사년(辛巳年, 1701년 숙종 27년)에는 나이 70에 아들이 시종(侍從)이 된 은전(恩典)으로 통정 대부(通政大夫)에 가자(加資)되어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에 제수되고, 명년에 제택(第宅)에서 생(生)을 마치니 바로 임오년(壬午年, 1702년 숙종 28년) 7월 8일이다. 이해 9월 22일에 충주(忠州) 서맹동(西孟洞) 율리(栗里)의 유좌(酉坐) 언덕에 장사지냈다.

공은 기풍(氣風)과 자용(姿容)이 깨끗하고 맑았으며 언어(言語)와 논변(論辨)이 뛰어나고 명쾌하여 한때 같은 연배들이 모두 추앙하여 존중히 여겼으며, 관학(館學, 성균관)에 있을 적에는 항상 사림(士林)들의 주론(主論)으로 삼았다. 갑인년(甲寅年, 1674년 현종 15년)에 조정(朝廷)에서 명망(名望)과 덕행(德行)이 있는 선비를 천거했을 때 공이 홍득우(洪得禹)ㆍ이인혁(李寅爀) 제공(諸公)과 더불어 함께 추천(推薦)에 올랐는데, 대개 모두 한 세대의 인망(人望)들이었다. 을묘년(乙卯年, 1675년 숙종 원년) 이후로는 천거를 사양하고 자취를 서호(西湖)에 감추고 여생을 마칠 계획을 했는데 벼슬길에 들어옴에 미쳐 현령(縣令)으로 부임함에 이르러서는 세록지신(世祿之臣)으로서 조정의 명(命)에 사은(謝恩)하고자 하지 않았는데, 이는 좋아하는 바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전후(前後) 중앙과 외방의 관직(官職)에 있을 때는 항상 청렴하고 명결(明潔)한 것으로 자신을 단속했으며 공무를 받들고 법을 지킴에 있어 흔들리거나 굴복한 바가 없었다. 그리고 민사(民事)와 군정(軍政), 학교(學校)ㆍ전결(田結)ㆍ송옥(訟獄)ㆍ진조(賑糶)에도 심력(心力)을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니, 그 정성스럽고 삼가며 자세하고 부지런함은 모두 후세의 법으로 삼을 만한 것이었다.

열읍(列邑)은 진휼(賑恤)하는 행정이 있을 때를 당해서는 전례로 판매를 하여 이윤이 남는 것을 취하여 자본을 삼았는데, 공은 도리어 민간의 이익을 독점하는 것을 혐의하여 오직 스스로 입고 먹는 것을 줄여서 굶주린 백성을 먹여 살렸다. 고산현(高山縣)에 있을 적에 상사(上司)의 법 아닌 명령을 따르지 않다가 축출당하였고, 영덕(盈德)에 있을 때는 토호(土豪)를 다스리다 죽음에 이른 자가 세 사람이었는데 그 집안에서 호소하면서 심지어 뇌물에 가까이했다고 무고(誣告)해서 마침내 당시 득세하는 무리들에게 구함(構陷)당하는 바 되었다. 그래서 한 해 동안 구금되어 있었으나 공의 청렴한 조행(操行)은 본디 드러난 터이라 아무리 캐어 조사해도 뇌물에 가까이한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고 다만 남형(濫刑)으로 원배(遠配)되었을 뿐이었다.

귀양지에 있을 때는 문을 닫고 조용히 들어앉아 오직 전적(典籍)을 탐구(探究)하는 것을 스스로 즐기면서 천리 밖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는 신세임을 잊고 있었다. 귀양에서 풀려 돌아온 뒤 여러 해가 되었으나 서임(敍任)의 은전(恩典)이 오래도록 내려지지 않자 논의자가 ‘조정의 신하는 마땅히 원통함을 아뢰어야 한다’고 말을 하자, 공은 말하기를, “당시(當時)에 화(禍)를 벗어난 것과 금일에 살아서 돌아온 것이 모두 성은(聖恩)인데, 어찌 감히 다시 간택(揀擇)될 계획을 한단 말인가?” 하고, 여러 아들들에게 입을 열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공의 지키던 것을 여기에서도 볼 수가 있다.

공은 효성과 우애가 천성(天性)에서 나와 일찍이 고자(孤子)가 되어 치양(致養)하지 못한 것을 지통(至痛)으로 여겼으므로, 자친[慈夫人]을 받들되 거처와 음식에 있어 따뜻하고 서늘하고 달고 맛있는 것을 매우 알맞게 봉양을 하였고, 세상을 떠남에 이르러서는 여묘(廬墓)살이를 하는 등 지나치게 거상(居喪)을 하다가 지쳐서 병이 되었다. 그리고 복(服)을 벗은 뒤에도 오히려 지키고 차마 여묘에서 떠나지 못한 것이 3년간이었다. 명절(名節)에 산소에 올라가 성묘하는 것도 노쇠하다는 이유로 한번도 그만두지 않았다. 고조(高祖) 이상 2대 선영(先塋)이 같은 산에 같이 있는데 읍(邑)에 있을 적에 사계절에 고조묘(高祖墓)에 제사를 지내고 번번이 2대 묘에도 아울러 제사를 지냈다.

백씨(伯氏, 이지웅(李志雄))와 소싯적에 일찍이 동거(同居)를 해 오다가 중년(中年)에 이르러서는 백씨의 집 곁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살면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상종(相從)하였고 일찍이 서로 떨어져 있지를 않았다. 그리고 여러 자질(子姪)을 가르치되 반드시 의로운 방법으로 가르쳤고 더욱이 주색(酒色)과 사치(奢侈)에 대해 엄하게 경계를 하였다. 또한 중표(中表, 내외종(內外從))에게만 화목[睦婣]하게 지내는 것이 아니라 빈한한 시골 먼 일가라도 참으로 이름이 보첩(譜牒)에 있으면 문득 정성을 다하여 보살펴주고 종회(宗會)의 법(法)을 강론(講論)하여 친한 이를 친히 하는 정의(情誼)를 독실히 하였으니, 이것이 모두 공의 가정(家庭)에서 지키는 아름다운 행실이었다.

공은 몸을 지키기를 고요하고 참하게 하여 평생(平生) 하나도 남에게 구걸(求乞)한 것이 없었고, 사람이 간사한 작태(作態)를 하는 자가 있으면 그 얼굴에 침을 뱉고자 하였으며, 마음을 세우되 밝고 정직하여 속이지 않는 것에 힘을 썼다. 그러므로 사람이 서로 속이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깊이 미워하여 심하게 배척하였고 ‘편당(偏黨)’ 두 글자에 이르러서는 마음속에 두지 않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한번도 입에 담지 않았으며, 붕우(朋友)에게 권면(勸勉)하고 자제(子弟)에게 경계(警戒)시킨 것도 미상불 여기에 있었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관세(盥洗)를 하고 의관(衣冠)을 정제(整齊)하고 앉으면 자리를 반드시 바르게 하고 방 하나를 깨끗이 쓸고서 온종일 게으른 모습이 없었다. 그리고 거처하는 집의 벽에 써 붙이기를, “내 집에 들어오는 자는 무릇 남의 선악(善惡)과 시정(時政)의 득실(得失)을 말하지 말라.” 하였다. 자제(子弟)들 중에 남의 불선(不善)한 것을 논하면 문득 꾸짖기를, “남의 악함을 말하고 남의 사정(私情)을 발설하는 것이 어찌 덕 있는 자의 행위이겠는가?” 하였다.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여 하객(賀客)이 문에 가득하니 곧 슬픈 기색을 하며 말하기를, “내옹(乃翁, 아버지가 아들에 대하여 쓰는 자칭)은 늙도록 경서(經書)를 연구하였으나 끝내 성공을 하지 못했는데 내 아이는 과거 급제를 해냈으니 어찌 가상하지 않은가? 한번 그 몸을 허락하면 문득 근심과 걱정을 해야 하는 시초이니, 내가 마음속으로 기뻐하지 않는 까닭이다.” 하였다. 아들이 일을 말하다가 지방으로 보직(補職)되어 나가게 되자, 또 태연하게 말하기를, “직책(職責)에는 내직(內職)과 외직(外職)의 구분이 없는 것이며 민사(民社)에는 크고 작은 차별이 없는 것이다.” 하고, 일정(日程)을 엄하게 하여 머물지 말고 빨리 떠나도록 경계할 따름이었다. 아! 이 몇 가지 조목을 보면 공의 사람 됨됨이를 대개 알 수가 있고, 또 이 밖의 언행(言行)이 전할 만한 것이 많으나, 다 기재할 수가 없다.

공은 문장(文章)에는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나 더욱 시(詩)에 능하여 그가 읊은 시가 사람들에게 전송(傳誦)되는 것이 많다. 유고(遺稿) 5권이 있어 집에 보관하고 있는데, 총 1천 5백여 수(首)이다.
아! 이것이 또한 하나의 없어지지 않을 것이 된다.

배위(配位)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숙부인(淑夫人)에 봉해졌는데, 생원(生員) 권순열(權順悅)의 딸이다. 5녀 2남을 두었으니, 장남 이세근(李世瑾)은 지평(持平)으로 나가 음성 현감(陰城縣監)에 보직(補職)되었고, 차남은 이세진(李世璡)이다. 장녀는 유중영(柳重榮)에게, 차녀는 진사(進士) 어사하(魚史夏)에게, 3녀는 정만준(鄭萬準)에게, 4녀는 군수(郡守) 조세망(趙世望)에게, 5녀는 유창진(柳昌晉)에게 각각 시집갔다.

음성 현감은 3남을 두었으니 이정주(李挺柱)이고, 이세진은 3남을 두었으니 이정집(李挺楫)ㆍ이정림(李挺霖)이고 나머지는 어리다. 어사하(魚史夏)는 2남 1녀를 두었으니 어유관(魚有寬)ㆍ어유인(魚有寅)과 사위 이하영(李夏榮)이며, 정만준(鄭萬準)은 계자(繼子)를 두었고, 조세망(趙世望)은 딸 셋을 두었으며, 유중영ㆍ유창진은 아들을 못 두고 일찍 죽었다.

공이 세상을 떠난 지 기년(期年)에 음성 현감이 공의 행장(行狀)을 지어 가지고 상복 차림으로 먼 곳까지 찾아와서 묘명(墓銘)을 청하였다. 나 윤증(尹拯)은 소싯적부터 세상 출입을 하지 않아서 비록 공과 종유(從遊)하지는 못했으나 대대로 사귀어 온 정의가 이미 보통이 아닌데다, 재종제(再從弟) 윤택(尹擇)은 아사(雅士)인데 공과 내외종 형제간이었다. 생시에 일찍이 공을 적잖이 칭도(稱道)하였고, 윤규(尹揆)는 공의 조카 사위인데 또 항상 공의 행의(行義)에 대해 말하기를 매우 자세히 하였다. 그리고 효자(孝子)의 애처로운 간청을 끝까지 사양해서는 안 될 것이 있어서, 이에 늙고 고루(孤陋)함을 잊고 대략 그 행장에서 뽑아 서술하고 명(銘)으로 이었다. 다음과 같이 명(銘)을 쓴다.

선비가 세상에 살아가면서 귀(貴)한 것은 자기 몸에서 얻는 것이니,

실제가 승(勝)하면 미쁘지만 이름이 승하면 부끄러움이 된다.

공의 본말(本末)을 생각하니 문장과 덕행이 있네.

자랑하지도 구차하지도 않으니 얻고 잃는 것은 명(命)대로 할 뿐,

마음이 맑고 넓어서 그 운치 세속 태를 벗었네. 또한 조정의 평판 있었으니 난초와 백옥에 비교했네.

벼슬은 현직(顯職)에 오르지 못했고 수명도 길지 못하였네.

덕에 비해 비록 부족하나 내가 탄식할 게 뭐 있겠는가?

어진 아들이 있어서 그 아름다움 나타내려고 생각하네.

내가 쓴 글이 너무 화려하게 않았으니, 부끄럼이 없길 바랄 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