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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죽리 양무공사(曾坪邑 竹里 襄武公祠)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증평읍 죽리 양무공사(曾坪邑 竹里 襄武公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0. 8. 11. 17:29

 

황희석(黃希碩: ?∼1394)은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武臣)으로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고려 때 시중(侍中) 유중(裕中)의 후손으로 판서(判書) 천록(天祿)의 아들이다. 본래는 출가했다가 우왕 때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를 지냈다. 우왕 7년(1381) 왜구가 명량향(鳴梁鄕)에 침입하는 등 전라도가 어수선해지자 체찰사로 파견됐고,후에 단주상만호(端州上萬戶)를 지냈다.고려 우왕 14년(1388)에 요동정벌 때 이성계를 따라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다. 공양왕(恭讓王) 1년에는 회군공신(回軍功臣)에 책봉됐다.정몽주(鄭夢周)가 피살된 후 이성계의 명을 받아 정몽주 일파를 탄핵하는 임무를 수행하여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건국의 명분을 세웠다. 조선 태조 1년(1392) 8월 개국공신을 책록할 때, 원종공신에 책록됐고, 한달 후 태조의 특지(特旨)로 개국공신(開國功臣) 2등에 책록되어 상의중추원사(商議中樞院事)로
서 의흥친군위도진무(義興親軍衛都鎭撫)를 겸했다. 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로 평해군(平海君)에 봉해졌다. 태조는 황희석이 질병에 시달린다는 소식을 듣고 의관(醫官)을 보내어 치료하도록 했으나, 1394년 세상을 하직했다. 죽은 뒤에는 이화(李和)를 보내어 예장(禮葬)과 부의(賻儀)를 후하게 했으며,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에 추증(追贈)됐다. 시호(諡號)는 양무(襄武)이다.조선 선조(宣祖) 28년(1595)에 증평군 증평읍 죽리에 불천사우(不遷祠宇)가 건립되어 제향(祭享)되고 있다.[증평군지]

 

 

 

 

 

 

 

 

 

 

 

 

 

 

 

 

 

 

 

 

 

 

 

 

 

 

 

 

ㆍ양무공사(襄武公祠) : 양무공(襄武公) 황희석(黃希碩)의 불천지위(不遷之位) 사당으로, 증평읍 죽리 101번지 ‘원평’에 있다.

선조 28년(1595)에 처음으로 세워진 이 사당은 영조 5년(1729)ㆍ1952년ㆍ1972년에 중수했고, 건물의 구조는 정면 3칸ㆍ측면 1칸 반의 맞배지붕 겹처마 목조기와집이다. 사당 앞에는 정면 3칸ㆍ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의 동재(東齋)와 정면 2칸ㆍ측면 1칸 맞배지붕 구조의 서재(西齋)가 있다.

그리고 사당 앞에는 1978년에 세운 ‘평해군묘정비(平海軍廟庭碑)’가 있다. 건물 둘레에는 솟을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으며, 밖에서 보면 좌측에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2004년 4월 30일에 증평군유형문화재 제4호로 지정되었다.
양무공(襄武公) 황희석(黃希碩: ?~1394)은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으로, 본관은 평해(平海)이다.

고려 우왕 7년(1381)에 왜구가 침입해 전라도 지역이 소란해지자 체찰사(體察使)로 파견돼 진압했다. 1388년에 요동 원정군이 발진하자 청주상만호(淸州上萬戶)로서 예하군사를 이끌고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휘하에 들어갔다.

이성계가 회군(回軍)을 단행해 반정에 성공하자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올랐으며, 공양왕 1년(1389) 회군공신에 책록되었다.

정몽주가 격살 당하자 사태 수습책으로 정몽주 일파를 탄핵해 정몽주 일파에게 죄줄 것을 청함으로써 공양왕의 폐위와 조선 건국의 명분을 세운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다.

조선 태조 1년(1392) 8월에 조선 개국공신 44인과 원종공신 28인이 책봉될 때 포함되었다가, 한 달 뒤에 태조의 특지로 개국공신 2등에 추가 책록되었다. 1394년에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를 지내다가 죽으니 사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