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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성면 군수황준량선정비(丹城面 郡守黃俊良善政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단양군(丹陽郡)

단성면 군수황준량선정비(丹城面 郡守黃俊良善政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9. 10. 19:57



단성면 수몰 이주기념관 야외전시장에 있는 조선시대의 단양군수 황준량의 선정비 입니다.

비석은 비신의 한쪽이 파손되어 있습니다.비석이 동강이 난것을 이어 붙여 놓았습니다

비석의 전면에는 군수황공준량선정비(郡守黃公俊良善政碑)라고 적혀있습니다.



황준량은 1517(중종 12)∼1563(명종 18).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본관은 평해(). 자는 중거(), 호는 금계(). 사온서주부 황영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황효동()이고, 아버지는 황치()이며, 어머니는 교수 황한필()의 딸이다. 이황()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재주가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고, 문명()이 자자하였다. 1537년(중종 32) 생원이 되고, 1540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권지성균관학유()로 임명되고, 이어 성주훈도로 차출되었다.

1542년 성균관학유가 되고, 이듬해 학록()으로 승진되었으며, 양현고봉사를 겸하였다. 1544년 학정, 1547년(명종 2) 박사에 이어 전적에 올랐다.

1548년 공조좌랑에 재직중 상을 당해 3년간 시묘한 뒤 1550년 전적에 복직되었다.

이어 호조좌랑으로 전직되어 춘추관기사관을 겸했으며, 『중종실록』·『인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해 다시 병조좌랑으로 전직되었고, 불교를 배척하는 소를 올렸다. 1551년 경상도 감찰어사()로 임명되고, 이어 지평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앞서 청탁을 했다가 거절당한 바 있는 언관의 모함이 있자, 외직을 자청해 신녕현감으로 부임했다가 1556년 병으로 사직하였다.

이듬해 단양군수를 지내고, 1560년 성주목사에 임명되어 4년을 재임하였다. 그러다가 1563년 봄에 병으로 사직하고 돌아오는 도중 예천에서 졸하였다.

신녕현감으로 있을 때 기민을 잘 진휼()해 소생하게 하였다. 또한 전임관()의 부채를 절약과 긴축으로 보충하고 부채문권()은 태워버린 일도 있었다. 학교와 교육진흥에도 힘을 기울여 문묘()를 수축하고 백학서원()을 창설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단양군수로 부임했을 때는 경내의 피폐상을 상소해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하는 특은()을 받기도 하였다. 벽지에 있던 향교를 군내에 옮겨 세우고, 이 지방의 출신으로서 학행이 뛰어난 인물들을 문묘 서편에 따로 사우()를 마련해 제사하는 등 많은 치적을 남겼다.

성주목사로 나아가서도 영봉서원()의 증수, 문묘의 중수, 그리고 공곡서당()·녹봉정사(鹿) 등의 건립을 추진하였다.

그리고 이 지방의 학자 오건()을 교관()으로 삼는 등 교육진흥에 힘써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우애가 돈독했고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데 힘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청빈한 생활을 하였다. 자식이 없어 아우 수량()의 아들로 양자를 삼았다.

풍기의 욱양서원(), 신녕의 백학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금계집()』이 있다.

황준량[黃俊良]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