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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외면 구티리 김명진애민선정비(山外面 九峙里 金明鎭愛民善政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산외면 구티리 김명진애민선정비(山外面 九峙里 金明鎭愛民善政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8. 12. 3. 13:59



어사 김명진의 애민선정비가 있는 구티리는 본래 보은군 산외면 지역으로서 거북티 고개 밑이 되므로 거북티 또는 구티(龜峙)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티라 하였다. 구티는 원래 마을 입구에 있는 산이 거북이와 같다고 해서 구티(龜峙)라 하였으며, 또한 구티고개가 아홉구비(九峙)라고 해서 이렇게 불리게 되었다고도 하였다.



어사 김명진의 철비로 온전한 모습이 아니다.구티리 우체국옆에 자리하고 있다.

철비는 원래 무슨 연유인지 땅속에 묻혀있다가 1980년 홍수가 나면서 발견되였다고 한다.

주민들이 발견하여 현위치에 세웠다고 한다. 비의 상부부분이 파손되여 망실되고 재질이 철로서 글자도 부식이 심하여 잘 알아 볼수가 없다.


비의 뒷면에 있는 글을 보면 1875년(고종12) 동치(同治)14년 을해(乙亥)4월에 건립된것이다.

암행어사는 조선시대 국왕의 명령을 받고 지방행정의 잘잘못과 민심 및 백성의 생활상태를 조사하기 위해 파견되던 임시직책이다.
수의(繡衣) 또는 직지(直指)라고 부르기도 한다. 조선 초에는 행대(行臺) 또는 찰무(察務) 등의 이름으로 지방에 조사관을 파견했으며 세종 대에는 임명과 행동이 비밀리에 이루어지는 관리를 파견했다. 중종 대에 들어 비밀리에 어사를 파견하는 경우가 늘어났으며 명칭도 암행어사라고 불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암행어사의 파견에 대한 반대의견도 강해 선조 대까지는 별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왜란과 호란으로 정치의 기강이 흐트러짐에 따라 인조 이후 암행어사의 파견이 빈번히 이루어지면서 상설 제도화되다시피 했다. 특히 18, 19세기 삼정의 문란으로 민란이 자주 발생하자 이를 수습하고 민심을 회유할 목적으로 자주 파견되었다.

암행어사에게는 역마를 사용할 수 있는 증명서인 마패와 형구의 크기 등을 검열할 수 있는 유척(鍮尺, 놋쇠로 만든 자)이 지급되었다. 암행어사는 왕의 명령을 직접 집행하므로 관리의 파면 및 직무의 정지, 옥에 갇혀 있는 죄인의 재판, 백성의 고통과 청원의 처리 등 모든 문제를 현지에서 즉결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었으며 그 결과를 서면으로 왕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당쟁이 치열해지면서 암행어사 역시 자기가 속해 있는 당파나 인연이 있는 가문의 관리를 두둔하는 등 문제점을 발생시켰으며, 하급관리들의 부분적인 비행만을 들춰내는 데 그쳐 근본적인 행정개혁이나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하는 데는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김명진(金明鎭)은 1840년(헌종 6)∼미상. 고종 때의 문신. 본관은 안동. 자는 치성(稚誠).
조부는 김병선(金炳先), 부친은 김석균(金奭均)이며, 김세균(金世均)에게 입양되었다.
1870년(고종 7) 정시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1873년에 별겸춘추(別兼春秋)가 되고, 이듬해에는 암행어사
가 되어 충청좌도에 파견되었다.
1879년에 동부승지
를 거쳐 1882년에는 대사성
에 올랐다.
그뒤 시관(試官)‧춘천부사를 거쳐 1886년 경기관찰사
, 1888년 경상도관찰사등 외직에만 5년 이상 근무하였다. 경기‧경상도관찰사로 재직중에 올린 장계(狀啓)의 내용에는 당시 수취체제의 혼란상이 상세히 적혀 있어서 고종
연간의 사회상연구에 도움을 주고 있다.
《고종실록》에는 장계내용이 요약되어 나타나 있는 바, 경기도에 관한 것이 7회, 경상도에 관한 것이 4회나 기록되어 있다.
1890년에는 이조참판
을 지냈다.



김명진이 암행어사의 임무를 마치고 올린 별단의 내용이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여있다

그 이듬해 철비가 세워진 듯 하다

 

고종 11권, 11년(1874 갑술 / 청 동치(同治) 13년) 11월 4일(계묘) 2번째기사
암행어사 김명진의 별단에 따라 토지를 다시 측량하게 하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방금 충청좌도 암행어사(忠淸左道暗行御史) 김명진(金明鎭)의 별단(別單)을 보니, 그 하나는, 토지를 다시 측량하는 문제입니다. 본 도의 토지 면적이 오랫동안 문란하여 터무니없이 받아낸다는 원망의 소리가 가는 곳마다 있습니다. 이 논의가 오늘 나온 것이 아니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우선 한두 고을을 시험해보고 차차 시행하게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새로 일구거나 다시 일군 땅에 대해서 남김없이 조사하여 땅이 강바닥이 되고 물에 떨어져나간 재해 면적을 보충하는 문제입니다. 일군 땅을 조사하는 규정에서 이쪽이 물에 씻기거나 떨어져나가면 땅이 생겨난 저쪽에서 세액을 보충하는 것이 응당 시행해야 할 규례인 것입니다. 그러나 최근에 오면서 일단 재해 사고가 생기면 영영 묵은 밭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어느 정도 조사해낸 경우에도 결국 다시 세액을 매겨서 돌려주는데, 돌려준 후에는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고 담당 아전들이 농간질하는 밑천으로 들어가고 있으니, 이렇게 줄어들고서야 어떻게 세액을 채울 수 있으며 간사하고 교활한 무리들이 어떻게 그만둘 줄을 알겠습니까? 이전의 명령과 신칙대로 결수(結數)를 조사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각 고을의 조세를 감영에서 적당히 줄이고 함부로 차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문제입니다. 조세의 수량은 원래 정해진 규정이 있지만 최근에는 이 폐단이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번에 연석(筵席)에서 신칙(申飭)한 것을 가지고 온 나라에 행회(行會)하였으며 책으로 만들어 부에 보고하라는 공문까지 있었으니, 보고가 일제히 도착하기를 기다렸다가 잘되고 못된 것을 논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제언(堤堰) 부근에 논으로 만든 것은 없애고 폐기한 곳에는 제방을 쌓는 문제입니다. 제언을 수축(修築)하는 규례는 매번 군사들을 점검하여 모아가지고 옮겨다가 공사를 하였습니다. 최근에는 실제적인 정사를 볼 수 없는 것도 이미 지극하여 이를 데 없거니와 더구나 궁가에서 파견한 사람들과 토호들이 연줄을 타고 폐단을 만들어내는데 완성된 제방을 헐어서 여기저기에다 개인의 밭을 만들고 있지만 수령이나 감사들이 막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암행어사의 별단에서 한 사람이 이익을 독차지하고 백 명의 백성들이 피해를 받는다고 하는 것은 정곡을 찌른 것입니다. 이 문제를 가지고 특별히 신칙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군안(軍案)에는 건실한 장정과 부실한 장정을 그대로 등록하며 속오군(束伍軍)과 포군(砲軍)를 훈련하고 총 쏘는 연습을 시키도록 특별히 단속하는 문제입니다. 군안 제도는 옛날에도 규정이 있었지만 최근에는 군포(軍布)만 거두고 그 이름은 묻지 않습니다. 이에 징과 북을 울리는 데 따라 군사들이 진격하고 퇴각하며 깃발에 따라 위치를 차지하는 문제에 대하여 가르칠 만한 사람이 없는 것입니다. 이런 까닭으로 인하여 이미 경연에서 진술한 바 있는데 이번 암행어사의 논의도 이와 같으니, 종전의 신칙대로 다시 강조하여 시행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금년에 사창(社倉)의 환곡 5,000섬을 돈으로 만든 것은 반드시 기한 안에 수량대로 채워 넣고 이후에는 다시 돈으로 만들지 말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사창의 환곡 제도를 설치한 것은 백성들을 위하여 나왔으니, 결국 실질적인 혜택도 백성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지난번 대납을 허락한 것은 사실 어쩔 수 없는 정사에서 나온 것이니 본 전 곡식을 채우는 문제는 조금도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한 내에 만약 다시 채워 넣지 못하면 환자 곡식을 훔친 법조문을 적용하도록 이미 행회하였으니, 여기에 근거하여 다시 신칙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상당산성(上黨山城)의 군량 2,900여 섬은 다음해부터 옛 규례대로 본목(本牧)으로 하여금 조적(糶糴)하게 하고 다시 결수에 따라 나누지 말게 하며 산성 부근의 몇 개 면(面)에서 집집마다 나눠주고 고을 환곡을 다시 이중으로 주지 말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산성의 군량으로 인한 폐단은 고을 환곡보다 심합니다. 처음에 옮겨다가 쌀을 나누어준 것은 비록 백성들을 모집하기 위한 데서 나온 것이지만 가호에 따라 배정하지 않고 결수를 가지고 배당하였으니 여기에는 아무래도 까닭이 있을 것입니다. 감사와 병사, 수사들로 하여금 충분히 토의하여 처리하게 함으로써 더 징수한다는 원망이 없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음성(陰城)에서 계유년(1873) 조에 바치지 못한 대동미(大同米) 500여 석은 특별히 돈으로 대납하도록 허락하며 해당 고을에서 쓸 몫은 다음해부터 세액을 늘리지 말게 하고 군영이 있는 고을에서 좋은 방법에 따라 처리할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보잘것없이 자그마한 고을인데다가 흉년을 당하였으니, 백성들의 어려운 정상은 사실 암행어사의 논의와 같습니다. 적은 사람이 손해를 보고 많은 사람이 이익을 보는 방도에서는 마땅히 변통이 있어야 하겠으니, 청한 대로 돈으로 대신 물도록 허락할 것입니다. 세액을 늘리는 문제 같은 것은 특별히 적용한 규례가 있으니, 조정의 명령으로 더욱 엄하게 금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 하나는, 충청좌도(忠淸左道)의 생원 진사 시험 장소를 영원히 충주(忠州)로 정한 뒤로는 참으로 치우치게 해로운 폐단이 있으니, 전례대로 각 해당 순서의 고을에 차례로 정할 것에 대한 문제입니다. 시험치는 고을을 나누어 정하는 것은 고법(古法)에도 그러하였는데 그 중간에 폐단을 수습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본 고을에 정하였지만 이미 치우치게 해롭다고 하니, 종래의 규정대로 적당히 돌아가면서 정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하였다.

【원본】 15책 11권 90장 B면
【영인본】 1책 481면
【분류】 *군사-군역(軍役) / *재정-전세(田稅) / *농업-양전(量田) / *군사-군정(軍政) / *재정-군자(軍資) / *금융-화폐(貨幣) / *재정-창름(倉廩) / *금융-식리(殖利)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