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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북면 봉황리 이승칠항왜의결기념비(內北面 鳳凰里 李承七抗倭義訣記念碑) 본문
이승칠은 1850년(철종 1년) ~ 1912년 이며 자는 자는 두경(斗卿)이며 아버지는 이지현(李之鉉)입니다.
대한 제국 때의 의사(義士). 자는 두경(斗卿). 본관은 전주. 경주 영장(慶州營將) 지현(之鉉)의 아들. 보은(報恩) 천곡리(泉谷里)에 이사하여 학문을 닦고 1867년(고종 4) 무과에 급제, 경기도 도원 찰방(桃源察訪)ㆍ경상도 송라 찰방(松羅察訪)을 지내고, 1886년(고종 23) 사헌부 감찰이 되었으며 이르는 곳마다 명성과 치적이 높았다. 1910년 국권침탈의 소식을 듣고 다량의 아편을 먹음으로 자결을 기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향리에 돌아가 두문 불출했다. 1912년 왜황 메이지[明治]가 죽자 왜인으로부터 상복(喪服) 입기를 강요당하니 "내 몸에 원수의 상복을 입음은 만 대의 수치라" 는 유서를 써놓고 봉황정(鳳凰亭) 절벽 위에 올라가 북쪽을 향해 네 번 절한 후 푸른 물속에 뛰어들어 자결했다.
비석의 전면에는 이지사승칠공항왜의결기념비(李志士承七公抗倭義訣記念碑)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이승칠에 대한 내력이 적혀있다.
국가보훈처지정 현충시설로 지정되어 내북애향동지회에서 관리하고 있다.
이승칠지사의 공적비 개보수는 내북면 애향동지회에서 공사를 주관하였으며 개보수를 위한 후원은 청주보지청장 김연준씨가 1130만원 보은군수 정상혁씨가 400만원등을 합하여 2012년 10월23일 추진위원장 양재덕 총무 이재선이 수고하였다
개보수 준공비에 이승칠지사의 이름을 이승철로 오기하여 놓았다.많은 분들이 찾는 현충시설인 만큼 애향동지회에서 바로 잡아주길 바랍니다.
현재의 비석은 비문에 의하면 2015년에 새로 건립하였다.
[예전에 자리했던 이승칠의 기념비의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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