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청안면 조천리 장담충신각(淸安面 釣川里 張潭忠臣閣)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청안면 조천리 장담충신각(淸安面 釣川里 張潭忠臣閣)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2. 20. 05:20


장담충신각은 충청북도문화재자료 제73호 (2010년 3월 12일 지정) 되어 관리되고있다.

충신각 옆으로는 근간에 세워진 인동장문의 재실이 자리하고 있다.



'괴산 장담 충신각( )' 은 1729년(영조 5년)에 청안면 청룡리에 세워진 것을 40년 전에 청안면 조천리 산3-1번지로 이전했으며, 높은 석주형 주초 위에 짧은 원주를 세운 정면1칸, 측면 1칸의 맞배 목조와가로 석주형 주초나 이익공 계통의 공포 등은 전통적인 정려로서의 격식을 잘 갖추고 있다. 장담()은 영조 4년 청주에서 이인좌의 난이 일어나자 벼슬이 없는 처사 신분으로 의병을 일으켜 난을 진압하다 순절, 그의 동생 장환이 나머지 군사로 적을 토벌해 복수한 사실이 후에 진문돼 충신으로 정려됐으며, 호는 수풍정(), 본관은 인동()이다.



이인좌의 난은 조선 후기 이인좌 등의 소론()이 주도한 반란.

무신년(, 1728년)에 일어난 반란이라고 해서 무신란()이라고도 한다. 숙종 때 극심했던 서인과 남인의 당쟁은 서인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집권세력인 서인은 소론과 노론으로 다시 분파되어 당쟁은 계속되었다. 경종 때 소론과 노론의 당쟁은 극심했는데 소론은 경종 연간에 왕위 계승을 둘러싼 노론과의 대립에서 일단 승리하였다. 하지만 노론이 지지한 영조가 즉위하자 소론은 정치적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박필현() 등 소론의 강경파들은 영조가 숙종의 아들이 아니며 경종의 죽음에 관계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영조와 노론을 제거하고 밀풍군() 이탄()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여기에는 남인들도 일부 가담하였다.

한편 이들의 거병에는 유민()의 증가, 도적의 치성, 기층 민중의 저항적 분위기가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그리하여 반군은 지방의 사족과 토호가 지도하고 중간계층이 호응하며, 일반 군사는 점령지의 관군을 동원하거나 돈을 주고 동원하는 형태로 구성되었다. 이인좌는 1728년(영조 4) 3월 15일 청주성을 함락하고 경종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을 퍼뜨리면서 서울로 북상하였으나 24일에 경기도 안성과 죽산에서 관군에 격파되었고, 이인좌는 죽산 일대로 도피하였다가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능지처참되었다. 청주성에 남은 세력도 상당성에서 박민웅() 등의 창의군에 의해 무너졌다. 영남에서는 정희량()이 거병하여 안음·거창·합천·함양을 점령하였으나 경상도관찰사가 지휘하는 관군에 토벌당했다. 호남에서는 거병 전에 박필현 등의 가담자들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난의 진압에는 병조판서 오명항() 등 소론 인물들이 적극 참여하였으나, 이후 노론의 권력장악이 가속화하였고 소론은 재기불능의 상태가 되었다. 이 사건 이후 정부에서는 지방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였고 토착세력에 대한 수령들의 권한이 커져갔다. 또한 이때 반군이 군사를 동원한 여러 방식은 뒤의 홍경래의 난으로 이어졌다.


깔끔하게 잘 정리되어있다.

빗물에 의한 토사의 유출로 인하여 보호철망이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보수가 요망된다.


충신문(忠臣門) 밑에는 백세수풍(百世樹風)이라는 편액이 걸려있다.



이인좌는 1728년 청주읍성을 점령한 직후 곧바로 휘하의 부하들 중 일부를 주변 고을의 수령으로 파견했다. 훗날 영조 정부에 의해 '위칭', 즉 '가짜 현감'으로 표현된 이들은 이인좌의 격문을 휴대하고 충주, 진천, 목천, 회인, 황간, 보은, 음성 등으로 향했다.

이중 충주만 당시 목사 김재로(金在魯·1682-1759)의 저항으로 인해 온전함을 보존할 수 있었고, 대부분 지역은 반란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당시 이인좌는 청안현감으로 정중익(鄭重益)이라는 인물을 파견했다.
그러나 가짜 청안현감 정중익은 거의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고, 현지에 머문 기간도 열흘이 채 안 되었다. 목사 김재로가 충주에서 저항했다면, 청안에서는 자체적으로 일어난 의병들이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가 죽음으로서 지켜야 한다'는 주욕신사(主辱臣死)의 유교적 忠을 바탕으로 강력하게 저항했다.

이때 의병 참가자의 한 사람이 반란군 토벌 과정을 생생히 기록한 《討逆日記》(토역일기)를 남겼고, 그 일기 내용이 지난 1997년 이상주(현 중원대 교수) 박사에 의해 일반에 공개됐다.




일기는 당시 청안에 거주하던 장담(張譚·?-1728)이라는 선비가 정중익 반란군에 맞서 아우 헌과 함께 의병부대를 조직한 뒤 목격한 △의병모집 과정 △당시 청안현 소속 관군들의 무력함 △반란군 가담자의 성향과 민심 향배 등을 매우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일기는 또 반란군에 대한 토벌 작전 계획, 토벌 시기, 1차 토벌작전의 실패와 장담이 피살당할 때의 참상, 2차 토벌계획의 수립과 정중익 및 잔당 살해 등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 등을 마치 비디오를 보듯 자세하게 기술했다.
이 박사는 지난 2000년에 발표한 <토역일기에 대한 고찰>(서지학보 제24호) 논문에서 "1999년 장담의 후손인 장희균 씨가 토역일기를 소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당시 충주대 장병집 교수에게 연락하여 복사본을 전달받아 번역에 들어갔다"고 밝혔다.

《토역일기》는 총 104쪽 분량의 필사본이다. 이중 정중익을 토별하는 과정을 기록한 부분은 1~29쪽까지이고, 뒤는 제문과 지역사림들이 장담의 공적을 충청병사와 어사 들에 올려 포상해 줄 것을 건의한 정문(呈文·일종의 탄원서)이다.
또 조정에서 장담의 공적을 포상하고 정여문을 세우는 과정을 진척상황에 따라 일기식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토역일기》는 구사된 단어를 살펴본 결과, 1728년 무신년 당시가 아닌 1755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파악됐다.

저자는 미상이나 장담의 친척 중 함께 토벌작전에 참여한 장헌이라는 인물일 가능성이 높고 둘 사이는 종제(從弟), 즉 사촌아우 사이였다. 이들은 고려 장금용(張金用)을 시조로 하는 인동장씨의 후예로, 청안면 조천리에 세거했다.



현재 그곳에는 장담 충신각(도문화재자료 제73호)이 세워져 있다. 본래 1729년(영조 5년) 청안면 청룡리의 논으로 경작되는 들판에 세웠던 것을 지난 1960년대 후반에 조천리로 이건했다.
충신각은 맞배지붕 양식으로, 내부에는 공신 편액과 '이건중수기', '충신각, '百世樹風'(백세수풍) 등의 현판이 걸려 있다. '백세수풍'은 백대를 내려갈 기풍을 세웠다는 뜻이다.




장담 충신각 뒤로는 인동장씨들의 조상의 비를 모셔놓은 묘지가 있다.

충신각에서 바라본 조천리의 모습이 눈안에 가득찬다.




[청안면 조천리 마을입구에 자리하고 있는 인동장씨의 사당인 청화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