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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면 갈전리 효자 정재수효행비(馬老面 葛田里 孝子 정재수孝行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마로면 갈전리 효자 정재수효행비(馬老面 葛田里 孝子 정재수孝行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3. 19. 10:59

 

 

 

마로면 갈전리에서 옥천 청산면 법화리로 넘어가는 길 우측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정재수 묘비라고 적힌 커다란 입간판이 자리하고 있으니 찾기는 쉽습니다

지금은 이차선 포장도로이지만 그 시절에는 사람이나 겨우 다니는 길이였다고 합니다

입간판을 바라보며 길 건너편에 정재수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내문도 잘 설치되여 있으며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갈전리는 마로면의 동남쪽에 위치하며 북쪽으로 세중천이 흐르고 들이 넓다. 마을 입구에 저수지가 있으며 벼농사와 고추를 위주로 경작하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다. 자연마을로는 시루산, 운당골, 작은당골, 치랏골(갈전) 등이 있다. 시루산 마을은 갈전 북쪽 시루봉 밑에 있어서 붙은 이름이다. 본래 칡 밭이 많이 있으므로 치랏골 또는 갈전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갈전리 지명이 생겨났다. 옥천 전씨가 많이 거주하고 있으며 갈전리 저수지에서 수산으로 넘어가는 효자고개에는 효자 정재수의 전설이 전해지는 묘와 비석이 있다.

 

 

 

 

 

 

 

 

 

 

 

 

 

효자고개를 넘으면 옥천군 쪽에도 좌측으로 또 효자 정재수라는 입간판이 있습니다

 

 

 

청산면 법화리 일명 버구실에서 보은군 마로면으로 이어지는 험준한 고개가 있다. 이 고개가 "효자고개"이고 고개 정

상에는 정재수 효자비가 있다.

정재수가 경북 상주군 화서면 사산초등학교 2학년때 일이다. 고향은 청산면 법화리이고 그의 조부모와 큰아버지가

살고 있었으며, 재수 어린이는 아버지를 따라서 상주군 화서면에 살고 있었다.

평소 어린이답지 않게 과묵하고 침착했으며, 예의 바른 어린이였다. 1974년 1월22일은 설을 하루 앞둔 섣달 그믐이

었다. 며칠 전부터 내리기 시작한 눈은 연일 계속 내려 쌓였고, 폭설주의보가 내려 혹한이었다. 이렇게 춥고, 눈이 많

이 내려 쌓이는 날, 정재수 어린이는 아버지를 따라서 고향인 청산면 법화리 할아버지댁에 설을 세기 위하여 떠났다.

상주군 회북면에서 옥천군 청산면을 가자면 보은군 마로면을 거쳐서 효자고개를 넘어야만 하는데 길이 험준한 산고

개 길이라서 걸어서 가야만 했다.

정재수 부자는 눈이 무릎까지 빠지는 험한 산길을 혹독한 강추위와 싸워 가면서 걷고 있었다.

이윽고 화북면을 거쳐서 마로면에 왔을 때 눈보라는 더욱 기승을 부려 더이상 갈 수가 없어서 이들 부자는 어느 술집

에 들려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술집에서 정씨는 꽤 많은 술을 마셨고, 술에 많이 취한 정씨는 술기운에 추위도 모르고 오직 내일이 설이니 오늘밤에

꼭 고개를 넘어서 고향에 가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여러사람의 만류도 뿌리치고 혹한과 눈보라 속을 뚫고 정재수 부자는 청산을 향하여 길을 떠나고 말았다. 길을 잃어

버리기를 몇 번, 눈이 무릎위까지 빠지는 산길을 술취한 아버지를 모시고 밤이 꽤 깊어서야 고개마루까지 오게 되었

다. 그때 정씨는 "이제 더 못 가겠다"하더니 푹 쓰러지고 마는게 아닌가!

정재수 어린이는 "아버지! 아버지!"부르면서 아버지를 일으켜 세우려 했지만 꼬마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정재수 어린이는 술 취해 쓰러진 아버지를 위하여 자신의 옷을 벗어 아버지를 덮어 주고, 극진히 보살폈지만 그 혹독

한 추위 앞에서 그들은 동사하고 말았다.

이튿날 동네 사람들에게 발견된 이들 부자의 시체는 차마 눈뜨고는 못볼 감격적인 장면이었다. 어린 재수군이 아버지

를 죽지 않게 하려고 애쓰다 자기도 죽게 된 그 상태가 너무도 역력했기 때문이다.

그후 정재수 어린이의 효행을 길이 교훈 삼고자 그리고 이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산마루 위에 「정재수 효자비」

를 학생들의 정성으로 세워서 지금도 전하며 그후 이 고개를 "효자고개"라 부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