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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로면 원정리 원정리삼층석탑(馬老面 猿汀里 猿汀里三層石塔)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보은군(報恩郡)

마로면 원정리 원정리삼층석탑(馬老面 猿汀里 猿汀里三層石塔)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3. 24. 19:47



몇 번이고 찾으러고 하다가 지레 발길을 돌렸다고나 할까?

마로광업소 안쪽 사유지를 통해서 접근해야 만날수 있다.


원정리는 본래 보은군 마로면의 지역으로서, 원정 최수성(猿亭 崔壽城)이 살았으므로 원정 또는 원징이라 하였는데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모동(牟洞), 점동(店洞), 월남리(月南里)를 병합하여 원정리라 하였다.



마로광업소는 모동 서남쪽에 있는 광산으로 1917년부터 4년간 일본 사람이 경영하다가 한일 광업주식회사가 불하를 받아 1958년부터 흑연을 캐다가 오늘날 폐광 상태인것인지 광업소입구에 있는 건물이 썰렁하다.


광업소 입구를 통하여 난 시멘트길을 차를 몰고 달리니 광업소가 있던 산은 산판이 한참이다.



원정리 1리 마을에서 흑연광이 있는 곳으로 1km정도 진입하면 된다., 이곳에서 오른쪽으로 작은 개울을 지나 600m 쯤 산정을 향해 올라간 위치에 절터가 있다. 대지 500평에 건평 30평정도의 절이 있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임야가 되고, 남쪽 산으로 올라가면 탑산석탑이 있다



원정리 탑산리에 있는 높이 3.68m의 3층 석탑. 충청북도 유헝문화재 제 118호로 지정되었다.
초층, 2층, 3층의 탑신석은 모두 우주가 모각되어 있으며, 각면에는 아무런 조식이 없는 소문이고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체감이 급격하여 중후한 느낌은 없다. 전체의 형태나 그 조성 수법으로 보아 신라형을 따른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1982년에 해체 복원되었다. 일제시대 광산을 운영하던 일본사람이 탑에 유물이 많다는 소문을 듣고 광부들을 동원하여 탑의 윗층을파손하고 도굴해간 뒤 마을이 불안하였는데 다시 광부와 마을 사람을 동원하여 탑을 복원한 뒤 마을이 무사하게 되었다고 전해오고 있다.[보은문화원]



탑으로 오르는 길은 여름에 장마등으로 만들어 놓은 임도는 제 모습을 잃고 그냥 길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길을 따라 정상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면 만날수 있다.


탑이 있는 곳에서 바라다 보이는 원정리와 멀리 보이는 넒은 들이 참 보기가 좋다.


높이 3.7m.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18호. 3매의 장대석으로 지대석(地臺石)을 마련한 후 갑석(甲石)과 면석(面石)이 하나의 석재로 조성된 단층기단을 놓았다. 갑석의 상면에는 별석(別石)으로 조성된 각형 3단의 초층 탑신 받침을 놓았다. 옥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1석으로 조성되었다. 매층 옥신석의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가 모각되었는데, 상면으로 갈수록 급격한 체감(遞減)을 보이고 있다. 옥개석의 하면에는 매층 각형 3단의 옥개받침이 조출되었다.

낙수면의 길이가 짧고 경사가 급한데,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 전각에 이르러 둔중한 반전을 보이고 있다.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보주(寶珠)가 남아있다.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1982년에 해체·복원하였다.

이 석탑은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상주군 화북면에서 광산을 운영하던 일본인이 광부를 동원하여 탑의 위층을 파손하고 도굴해 갔다고 한다. 이후 마을에 우환이 끊이지 않았으나, 일본인 마에다(前田)가 이곳에 광산을 설치하고, 탑을 복원한 후부터 마을이 평안해졌다고 한다.[문화유적총람]



이 곳 원정리의 지명을 갖게한 최수정(1487년(성종18년)-1521년(중종16년))은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가진(可鎭), 호는 원정(猿亭)·북해거사(北海居士)·경포산인(鏡浦山人). 치운(致雲)의 증손자로 생원 세효(世孝)의 아들이다.

김굉필(金宏弼)의 문하에서 배출된 신진사림파(新進士林派) 학자로서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과 교유하였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친구들이 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아예 포기하고 술과 여행, 시서화(詩書畫), 음악으로 일생을 보냈다. 1521년 35세 때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남탄현(南炭峴)에 집을 마련해서 원숭이를 길들여 함께 살았으며 원정이라는 아호는 그 것에서 연유하였다. 젊어서부터 세속을 멀리하여 명산승경을 유람하며 술과 거문고, 시를 즐겼고 뜻이 맞는 교우들과는 만남에서 화흥(畫興)을 폈다.

문장·시·서화·음률이 모두 뛰어난 절세의 기재(奇才)로 평가되었으나 유작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인종 때 신원(伸寃)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강릉의 향사(鄕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