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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량면 대전리 영모사(東良面 大田里 永慕祠)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동량면 대전리 영모사(東良面 大田里 永慕祠)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4. 19. 15:28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에 있는 일제강점기 사당.


사우(祠宇)는 선현(先賢)과 충신(忠臣), 조상 등의 위패를 모시고 제향을 올리는 사당의 하나로, 대개 지방의 유림이나 지방관, 배향자의 후손 및 제자 등에 의해 세워졌으며, 사액을 청하는 소(疏)인 청액소(請額疏)를 올려 사액을 받기도 하였다. 충주 영모사는 일제강점기 때 세워져 사액을 받지는 않았다. 충주최씨 후손들이 시조인 최승(崔陞) 등 선조 8인을 모시고 제향을 올리기 위해 1922년에 세웠다.


충주에서 제천 방향 19번 도로를 타고 가다 목행대교를 건너 직진한 뒤, 오른쪽 중원중학교가 보이는 곳을 지나 금가삼거리 못 미쳐 현대주유소 앞쪽에서 오른쪽으로 들어가면 대미마을과 사천마을이 나오는데, 대전리 쪽으로 들어가 내동부락을 찾으면 된다. 큰 암석 위에 쓰인 내동부락 표석에서 약 300m 정도 들어가면 충주 영모사가 나온다. 인근에는 충주 연안이씨 쌍효각이 있다.

충주 영모사는 남향으로 배치되었는데,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퇴(前退)를 둔 목조기와지붕이다. 특징적인 것은 충주 영모사 뒤편에 봉분이 모셔져 있다는 점이다.


충주 영모사는 현재 충주최씨 종중에서 관리하며, 일 년에 두 차례 제사를 올려 충주최씨의 기원을 되새기고 종중의 화합을 꾀하고 있다. 1998년 1월 9일에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19호로 지정되었다.


신라 말 최승이 충주에 거처한 이후, 후손들이 이 지역을 본관으로 하여 충주최씨가 되었다. 충주최씨 종중 사람들이 뿌리를 잊지 않고 선조를 제향하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서, 조상의 얼을 받드는 추모의 장소인 만큼 향토 문화의 정립과 역사 교육에 큰 의미가 있다.




충주최씨는 최승(崔陞)을 시조로 한다. 그러나 최승 이후 계보를 알 수 없어 고려 충선왕 때 판도판서·예문관대제학을 지낸 최공의(崔公義)를 중시조 겸 1세조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최승은 당나라 태생으로 본래 이름은 최우(崔偶)다. 889년(진성여왕 3) 원종(元宗)·경노(京奴) 등이 난을 일으키자 상장군으로 와서 난을 평정한 공으로 은청광록대부에 오른 후 신라인으로 귀화하여 충주에 정착하였다. 이후 후손들이 최승을 시조로, 충주를 본관으로 해서 세거하게 되었다.




최우청은 고려 후기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용대리 출신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문하시랑 최옥의 아들이다.

최우청은 고려 후기 무신 집권기에 활약한 충주 출신 인사로 몇 안 되는 문신 출신 재상의 하나이다. 충주의 주리(州吏)로 있다가 인종 대 문과에 급제하여 진례현위가 되었다. 명종의 잠저(潛邸) 당시 익양부(翼陽府) 전첨(典籤)이 되어 명종을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즉위 후 명종최우청을 총임하여 대간직을 맡겼다.
1174년(명종 4)에는 병마부사로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진압하는 데 공을 세워 국자좨주에 발탁되었다. 또한 좌간의대부를 거쳐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정주도령(靜州都領) 순부(純夫)와 낭장 김숭(金崇)의 반란을 진압한 공으로 판위위사(判尉衛事)로 승진되었다.

1181년(명종 11) 12월 한림학사승지에 전보되었으며 1182년(명종 12)에는 추밀원사, 태사빈객에 제수됨으로써 재상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183년(명종 13) 72세로 퇴관을 요청하자
명종은 수사공좌복야(守司空左僕射)를 제수한 다음에 치사하게 하였다. 치사한 다음해인 1184년(명종 14)에 졸하였다.

시호를 충직(忠直)이라 하였으며, 고양서원에 배향되었다



최개국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충주 출신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자성(子省), 호는 남악(南岳)·추담(秋潭). 고려 때의 제학(提學) 최원유(崔原儒)의 후손이다. 할아버지는 감찰(監察) 최사공(崔士恭)이며, 아버지는 호조참판 최분(崔汾)이다.

최개국이약빙(李若氷)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38년(중종 33)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를 거쳐 1547년(명종 2) 정언·지평·개성부경력 등을 역임했다. 1565년 해주목사 재임시의 선정으로 향표리(鄕表裏) 1습(褶)을 하사받았다. 1574년(선조 7)에 호조참의를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고, 1576년 성절사(聖節使)로 명(明)에 다녀왔다.

묘소는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 산8번지에 있다. 묘역은 약 165.29m²(50여 평)으로 사각분에 초석을 둘렀으며, 봉분은 큰 편이며 석물은 상석(床石) 일체와 망주석 1조, 문관석 1조가 있으며 좌향은 오향(午向)이다.

충청북도 충주시 동량면 대전리에 있는 영모재(永慕齋)에 제향되었다. 신도비가 1938년에 세워졌고 월사(月沙) 이정구(李庭龜)가 신도비명을 찬술하였다.







비좌규수의 형태로 비석의 상단 부분이 귀접이 되어 있고 화강암으로 제작되었다. 비신의 크기는 45.5㎝×12㎝×105㎝이며, 받침돌은 66㎝×45㎝×25㎝의 규모이다. 받침돌 사면에는 장방형의 안상(眼象)을 마련하였고, 3단의 흔적을 남기고 있지만 큰 의미는 없는 듯하다.


비제 및 본문이 해서체로 쓰여 있다. 비제는 6㎝×7㎝의 크기로 ‘정육품현릉령충주최공주환호학사기념비(正六品顯陵令忠州崔公周煥號鶴史紀念碑)’라 음기하였고, 뒷면에는 최주환의 공적을 음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