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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행동 장암대한시각자(木杏洞 場岩臺漢詩刻字)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목행동 장암대한시각자(木杏洞 場岩臺漢詩刻字)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8. 31. 12:36

 

 

 

예성문화연구원에 회원으로 활동하시는 범바우님의 글을 접하고 한번 찾아 보았다.내려가는 길도 어렵고 바로 물가에 접하고 있어 조금은 위험한 곳이다.새로운 곳을 발견하고 그 곳에서 흐르는 역사를 알수 있다는 것이 참 좋다 시간을 내어 한번 더 찾아봐야겠다.

 

 

 

 

 

 

 

 

 

場岩臺下水西流(장암대하수서류)  장암대 아래 물은 서쪽으로 흐르니

西流何日復東流(서류하일복동류) 서쪽으로 흐르던 물 어느 날 다시 동으로 흐를까

此池无窮水流流(차지무궁수류류)  이 연못 다함없이 물 흐르고 흐르는데

去流來流不盡流(거류내류불진류)  흘러가고 흘러와도 흐름이 다하지 않네

 

歲甲辰年(세갑진년)

단기 四二九七 暮春 日(단기 사이구칠 모춘 일)

 

何觀 申德永 題(하관 신덕영 제)


 각자한 날은  먼저 단기 4297년 갑진(甲辰)1964년이고 모춘(暮春)은 음력 3월이다.

 

신덕영 (1890-1968)은 호가 하관(何觀), 백한(伯漢), 이평(李平) 이다.

일제강점기 광복단중앙총본부 단장, 대한독립운동자동맹 대표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1910년에 보성전문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1914년에 만주로 건너가 통화현(通化縣)의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에 입학, 이듬해 졸업하였다.
1916년에는 간도의 교포학교 교사로 재직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17년 북만주 동녕현(東寧縣)에 호분중학교(虎賁中學校)를 설립하고 학감으로 재직하며 군사교육을 전담하였다.
1920년 이동녕(李東寧)·박은식(朴殷植)으로부터 군자금 모금의 사명을 받고 귀국, 대동단(大同團)에 가입하였다. 이후 대외용으로 만주농림주식회사(滿洲農林株式會社)를 설립하고, 독립자금을 모금하여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로 보내기 위해 부한청년단(扶韓靑年團)을 조직하였다. 그러나 독립자금을 모금할 때는 만주농림주식회사의 주식모집원으로 가장하여 활동하도록 하였다.
같은 해 8월 하순 신종선(申鍾善)으로부터 대동단 명의의 군자금 모금에 관한 권유문을 받아서 광주(光州)에 내려가, 노형규(盧衡奎)가 지명한 정인채(鄭麟采)·양사형(梁士亨) 등 여러 사람에게 우송하고 상경하였다.
그 뒤 대동단 총재 김가진(金嘉鎭) 명의의 포고문과 대동단 조선총지단(朝鮮總支團) 부장 한부(韓扶)의 이름으로 된 경고문을 전라남도 부호인 노종승(盧鍾升)·정해붕(鄭海鵬)·양재국(梁在國)·국채웅(鞠採雄) 등에게 발송하였다.
같은 해 10월 광주에서 이윤호(李允鎬)·노석정(盧錫正)·김정련(金正連) 등을 부한청년단에 가입시키고, 신유선(辛有善)·정호필(鄭鎬弼)·정원채(鄭遠采) 등에게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다.
군자금 모금원을 여러 반으로 나누어 1반은 박일봉(朴日鳳)·이윤호로 편성하여 화순과 나주 방면을 맡기고, 2반은 신덕영과 최양옥(崔養玉)·노기준(盧基準)으로 편성해 담양과 곡성 방면을 맡겨서 많은 군자금을 모아 상해의 임시정부로 보냈다.
한편 임시정부의 특파원 한준호(韓俊鎬)·박문용(朴文容)·정용택(鄭容澤) 등과 연락을 취하면서 군자금 모금에 진력하던 중, 같은 해 11월 최양옥·노기준이 광주에서 붙잡혀 신덕영도 담양경찰서원에게 붙잡혔다.
1921년 5월 광주법원에서 징역 8년을 언도받고 복역 중 1923년 5월 신병으로 가출옥하여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다가 탈출하여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7년 최양옥·안창남(安昌男)·김정련과 공명단(共鳴團)을 조직하고 북만주에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해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였다. 이에 따라 최양옥·김정련을 국내에 파견, 설립 기금을 모금하려다가 두 사람이 모두 붙잡혀 좌절되었다.
그 뒤 하얼빈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2년 6월 일본 경찰에 붙잡혀 대전형무소에서 형기를 마치고 1934년 10월 출옥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재외이재동포원호회(在外罹災同胞援護會)를 설립하고 독립투사들의 원호사업에 힘썼으며, 광복단(光復團)을 부활시켜 광복단중앙총본부 단장, 대한독립운동자동맹의 대표로서 건국사업에 노력하였다.
 

같이 독립운동을 하던 이 지방 출신 유석현에게 방문하였다가 이 곳 마당바위에서 잔치를 열며 남긴 신덕영의 시가 분명하다.

충주댐이 생기기전 주위풍경이 참 아름다웠던 이곳인데 지금은 내려가는 곳도 변변치 않고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서 잊혀지는 것 같다.

 

 

 

 

 


유석현은 일제강점기 의열단원, 광복회 고문, 광복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

충청북도 충주 출신으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했다가 일본경찰의 추적을 받아 같은 해 11월 중국 동삼성()으로 건너갔다. 1920년 7월 중국 톈진[]에서 의열단()에 입단해 1922년 2월 군자금 조달을 목적으로 국내로 들어왔다.

1922년 12월 김지섭()·윤병구() 등과 함께 총독 및 일제고관의 처단과 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찰서 등을 폭파하기 위한 군자금을 모집할 것을 협의하였다. 같은 해 12월 23일 동지들과 서울 무교동에 사는 총독부 판사 백윤화()를 방문해 군자금 5만원을 요구했다가 2,000원의 자금을 약속받았다.

12월 25일 밤 윤병구와 함께 약속된 군자금 수령을 위해 백윤화의 집을 찾아갔지만 백윤화의 신고로 미리 잠복해 있던 일본경찰에 윤병구는 붙잡히고 유석현은 탈출하였다. 군자금 모금에 실패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갔다.

그 곳에서 1923년 5월을 기해 전국각지에서 대폭동을 일으키고 요인을 암살하라는 지령을 받았다. 김시현()·황옥()·김지섭 등 동지를 규합해 국내에서 일제 기관의 파괴공작을 실행하고자 1923년 2월 국내로의 무기반입을 모의하고, 폭탄 36개, 권총 5정, 독립선언문 3,000매를 휴대하고 북경()에서 서울로 들어왔다.

같은 해 3월 15일을 기해 총독부·경찰서·재판소·동양척식회사·매일신보사() 등을 파괴할 거사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황옥의 밀고로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총독부에서는 밀정정책의 일환으로 경기도 경찰부장 시로가미[]가 한인 경부() 황옥을 상해()에 밀파해 극동민족대회()의 회의내용을 정탐하고 독립운동가의 활동을 밀탐해 기회를 만들어 독립운동가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본경찰은 황옥의 정보 제공으로 계획의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일거에 전원을 붙잡아 투옥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8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뒤 만기출옥해 1941년 다시 동삼성으로 건너갔다. 광복 후 광복회()의 고문과 광복회장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