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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구 모충동 충효양전문(일명:효자문) 본문

통합청주시/서원구(西原區)

흥덕구 모충동 충효양전문(일명:효자문)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09. 12. 12. 11:01

모충동에서 개신동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형성된 마을. 전에 이 고개에 배나무가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한 것이다.

'배티말', '바랑골', '안말', '새터'를 함께 이르기도 한다. 이곳에 곡성 연씨가 모여 살던 곳이라 '연배티'라 하기도 한다.

 

 

顯宗(현종) 4년(1663년)에 출생하였으며, 字(자)는 茂卿(무경), 號(호)는 痴堂(치당)이며 諡號(시호)는 毅愍(의민)이다. 南臺掌令(남대장령)을 역임한 延井渫(연정설)의 8세손으로 尤庵 宋時烈(우암 송시열)의 門下(문하)에서 師事(사사)하여 肅宗(숙종) 8년(1682년)에 增廣文科(증광문과)에 登科(등과)하였다.

이후 司憲府(사헌부) 監察(감찰)로 出仕(출사)하였으나 王室(왕실)의 葛藤(갈등)과 政爭(정쟁)의 混亂(혼란)에 厭症(염증)을 느껴 사임하고 野人(야인)이 되었다. 乙巳換局(을사환국)의 政變以後 肅宗(정변이후 숙종)이 失政挽回(실정만회)를 위한 求言(구언)을 勸(권)하자, 公(공)은 仁顯王后(인현왕후)의 廢位不當性(폐위부당성)과 各種 政事(각종정사)의 非理(비리) 등 7개항을 上疏(상소)했다. 그러나 肅宗(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御前(어전)에서 酷刑(혹형) 끝에 33세로 생을 磨勘(마감)했다.

2년 후 肅宗(숙종)은 悔悟反省(회오반성) 하고, 忠言(충언)을 收斂(수렴)했으며, 公(공)의 忠誠(충성)을 褒賞(포상)하여 都承旨(도승지)로 追贈(추증)하면서 忠孝兩全(충효양전)의 旌門(정문)을 建立(건립)하는 은전을 내렸다. 歲月(세월)이 지날수록 公(공)의 衷情(충정)에 대한 追慕(추모)는 이어져서 英祖(영조)와 正祖(정조)대에 연이어 吏曹判書(이조판서)와 弘文·藝文 兩館 大提學(홍문 예문 양관 대제학)으로 追贈(추증)되고, 毅愍(의민)이라는 諡號(시호)가 내려졌다. (別記 3, 四賢과 世阡의 槪說 참조)


 

 

 

 

조선 숙종때 문신인 연최적(延最績, 1663∼1693) 의 정려문이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택로(宅老)의 아들로 청주 출신이다. 송시열의 문인(門人)으로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감찰을 역임하였다.

인현왕후 폐위의 부당성을 상소하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옥사하였다.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도승지(都承旨)에 추증(追贈)되고, 1695년 순무사(巡撫使)가 그의 효친을 계달(啓達)하여 정려(旌閭)되었으며,

1747년(영조 23년) 이조판서 겸 대제학(大提學)이 더해지고 이듬해 충효양전문이 청주시 모충동에 세워져 현존한다.

시호는 의민(毅愍), 자는 무경(茂卿), 호는 치당(痴堂), 본관은 곡산(谷山)이다. 저서로는 치당유고(痴堂遺稿)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