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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덕읍 당우리 이복남충신문(周德邑 堂隅里 李福男忠臣門) 본문

중원의 향기/충주시(忠州市)

주덕읍 당우리 이복남충신문(周德邑 堂隅里 李福男忠臣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9. 9. 18:44



당우리는 지형적으로는 뒷동산을 경계로 장록리와 접하였고 서쪽은 설매산을 중심으로 신니면의 신청리와 접하였으며, 남쪽은 요도천을 경계로 신니면 학성마을과 접하였고 북은 자녀올등갱이산 아래 벌미못, 밭자녈못을 끌어안고 있는 형국으로 주덕읍 덕련리와 접하고 있다.


당우리는 본래 충주군 덕면에 속한 곳이었는데 1914년 군․면 통, 폐합시에 당모루(堂隅), 돌모루(石隅), 버들골(柳洞 :上柳洞, 下柳洞), 신대리(新垈里)와 신니면 수청골(水淸洞)의 일부를 병합하여 당우리(堂隅里)라 하고 주덕면에 편입하였다



이복남충신문이 있는 새터는 원당우에 속한 자연 마을 중 하나로 원당우의 동쪽에 있으며 갑신(1944)년 장마이후 새로 형성된 마을이다.

이복남충신문은 새터 과수원을 지나 민가 안쪽에 자리하고 있으므로 접근하기가 조금 힘들다. 

주소는 다음과 같다.  충북 충주시 주덕읍 당우리 521-1 (도로명주소 - 충주시 주덕읍 장록당우길 161 )로 표시하면 민가안에 위치한 충신문을 만날수 있다.민가안에 있으므로 주인의 허락을 얻고 들어가면 좋을것 같다.제가 찾을때는 비가와서 그런지 어디를 출타하셨는지 인기척이 없고 견공들의 소리만 높았다,



이복남충신문은 많이 쇠락되어 있는 상태이며 거의 관리가 되고 있지않다,

녹슨 철문하며 허물어진 담장 오래된 단청등 문창호지등의 파손등 관리가 시급한 상황이다. 




이복남 충신문은 1971년 건립된 이 건물은 임란시의 명장 이복남의 사당이다. 현판에 “忠臣 贈崇政大夫議政府左贊成兼判義禁府事折衝將軍守全羅道兵馬節度使李福男之門 甲申八月日重建”(충신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겸판의금부사절충장군수전라도병마절도사이복남지문 갑신팔월일중건)이라 쓰여 있다. 원 정문은 제천 봉양면에 있었는데 돌보는이 없어 허물어져서 현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이복남은 우계인으로 고려 명장 이의(李薿)의 후손으로 고조 지방(之芳), 증조 광식(光植), 조부 전(戩) 등은 모두 국가의 간성이었다.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을 거쳐 금성통판이 되었다. 임진란을 당하여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승리함에 그 공으로 붉은 비단옷을 하사받고 목사로 승진하였다. 이후 공은 군사를 모아 훈련을 시켜 정예 500인을 구성하였다고 한다. 만력 25년(1597) 8월에 왜군이 남원을 공격하자 명의 부총병 양원의 구원 요청을 받고 출동하여 포위진을 뚫고 남원성으로 진입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색이 짙게 되자 남원부 청사 대청의 의자에 앉아 부하에게 섶을 가져다 불을 지르게 하여 의연하게 순직하였고 이를 본 왜군들도 무릎을 치면서 충의를 칭찬하였다고 한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남원 충열사에 제향되어 자손들이 춘추제향시 남원충열사로 가서 제향을 올린다고 한다.



이복남(李福男, ? ~ 1597) 은  조선 중기 무신. 이전의 손자. 1592년(선조 25) 나주판관, 1593년 전라방어사·충청조방장(忠淸助防將),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었고, 1597년 정유재란 때 남원성에서 왜군과 싸우던 중, 조방장 김경로(金敬老), 산성별장(山城別將) 신호(申浩)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
좌찬성에 추증되고, 1612년(광해군 4)남원 충렬사에 봉향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남원 광한루에 걸린 이복남의 시조이다.

二載登臨寒上樓 /두 해에 걸쳐 광한루 위에 올라
故園歸夢大刀頭 / 머리맡에 큰 칼 두고 귀향을 꿈꾼다.
裳聞四海徵兵急 / 전국에 들리는 급한 징병 소식
已道三京指日收 / 이미 3경이 왜병의 수중에 있다고 하네.
末路知心黃石在 / 최후까지 황석의 병법 마음에 두었으매
暮年歸計赤松遊 / 노년에나 돌아가 신선놀음 하리라
白雲天末無消息 / 하늘 끝 흰 구름은 소식조차 없으니
傳世靑氈底處求 / 세상에 전하는 명예는 죽어서나 얻을까.




이복남에 대한 조선 왕조실록의 기록

 

선조 25년(1592 임진) 7월 1일  2번째 기사  

 

전라 절제사 권율이 왜적을 웅치에서 물리치다.

 

전라 절제사 권율(權慄)이 군사를 보내어 왜적을 웅치(熊峙)에서 물리쳤는데 김제군수  정담(鄭湛)이 전사하였다.  왜병이 또 이치(梨峙)를 침범하니 동복현감 황진(黃進)이 패배시켰다. 이때 적이 금산(錦山)에서 웅치를 넘어 전주(全州) 지경으로 침입하려고 했는데, 나주판관 이복남(李福男)이 황박(黃璞)· 정담 등과 요해지에 웅거하여 적을 맞아 공격하였으므로 감사 이광(李洸)이 군사를 보내어 싸움을 돕게 하였다.

 

왜적의 선봉(先鋒) 수천명이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며 정면으로 돌진해 왔는데, 복남 등이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활로 쏘아 죽인것이 헤아릴 수 없었으며 적이 패하여 물 갔다.  

이튿날 새벽에 적이 병력을 총동원하여 산골짜기에 가득하였고 총포소리가 우뢰처럼 쏟아졌다. 복남 등이 적의 일진(一陣)을 맞아 싸웠으나 결국 당해내지 못하고 퇴각하였으며, 황박의 군사도 패하여 복남의 진으로 들어갔다.

 

정담은 처음부터 힘을 다해 싸웠는데 붉은기 아래 백마(白馬)를 타고 있는 적장을 쏘아 죽이니 적이 와해되어 물러갔다.

 

조금 뒤에 나주(羅州) 군사가 퇴각하자, 정담이 고군(孤軍)으로 포위당했는데 부하 장수가 정담에게 후퇴시키기를 권하니 정담이 말하기를 ‘차라리 적병 한 놈을 더 죽이고 죽을지언정 차마 내몸을 위해 도망하여 적으로 하여금 기세를 부리게 할 수는 없다.’  하고 꼿꼿이 서서 동요하지 않고 활을 쏘아 빠짐없이 적을 맞추었다.

이윽고 적병이 사방으로 포위하자 군사들이 모두 흩어져 버리고 정담 혼자서 힘이 다하여 전사하였다. 종사관 이봉(李葑)도 전사하였다.

 

복남이 퇴각하여 재 아래 안진원(安鎭院)에 진을 쳤는데, 적이 방비가 있음을 알고 감히 재를 넘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정담은 군상(君上)이 도성을 떠나 피난했다는 사실을 듣고부터 눈물을 흘리고 분격해하며 반드시 죽음으로 국가의 은혜를 보답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군사를 일으키던 날에는 희생(犧牲)을 잡아 사사(社祠)에 제사를 지내고 맹세를 고한뒤 떠났는데, 고을 사람들이 그의 충의(忠義)에 감복하였다. 뒷날 조정에 아뢰어 관직을 추증하고 정문(旋門)을 세웠다.

 

왜장(倭將)이 또 대군(大軍)을 출동시켜 이치(梨峙)를 침범하자 권율이 황진을 독려하여 동복현의 군사를 거느리고 편비(偏裨)730) 위대기(魏大奇)· 공시억(孔時億) 등과 함께 재를 점거하여 크게 싸웠다.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오르자 황진이 나무를 의지하여 총탄을 막으며 활을 쏘았는데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종일토록 교전하여 적병을 대파하였는데, 시체가 쌓이고 피가 흘러 초목(草木)까지 피비린내가 났다. 이날 황진이 탄환에 맞아 조금 사기가 저하되자 권율이 장사들을 독려하여 계속하게 하였기 때문에 이길 수 있었다.

 

왜적들이 조선의 3대 전투를 일컬을 때에 이치(梨峙)의 전투를 첫째로 쳤다. 이복남· 황진은 이 전투로 이름이 드러났다. 왜적이 웅치(熊峙)의 전진(戰陣)에서 죽은 시체를 모아 길가에 묻어 몇 개의 무덤을 만들고 그 위에 ‘조선의 충간의담을 조위한다[吊朝鮮國忠肝義膽].’라고 썼다.

 

 

선조30년( 1597 정유) 9월 1일  1번째 기사  

 

적이 남원을 함락시키니 양원이 도망쳐 돌아왔으나 후에 중국에서 죽이다.

 

적이 남원을 함락시키니, 총병(總兵) 양원(楊元)은 도망하여 돌아왔고, 총병중군(總兵中軍) 이신방(李新芳), 천총(千總) 장표(蔣表)· 모승선(毛承先), 접반사(接伴使) 정기원(鄭期遠), 병사(兵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防禦使) 오응정(吳應井),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별장(別將) 신호(申浩), 부사(府使) 임현(任鉉), 판관(判官) 이덕회(李德恢), 구례 현감 이원춘(李元春) 등이 모두 죽었다.

 

처음에 적장 평행장(平行長)과 평의지(平義智) 등이 군사를 나누어 진격해 와 성을 몇 겹으로 포위하였다. 이때 양원과 이신방은 동문에 있고 천총 장표는 남문에 있고, 모승선은 서문에 있고 이복남은 북문에 있으면서 서로 여러 날 동안 버티었다. 적병이 나무와 풀로 참호를 메우고 밤을 틈타 육박해 올라와 어지러이 탄환을 쏘아대니, 성안이 크게 혼란하였다.

이에 양원은 휘하 몇사람과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 겨우 죽음을 면하였고, 중국 군사와 우리 군사는 모두 죽었다. 이신방· 장표· 모승선· 정기원· 이복남· 오응정· 김경로· 신호· 임현· 이덕회· 이원춘도 모두 전사하였다. 남원이 함락되자 전주(全州) 이북이 한꺼번에 와해되어 어찌 해볼 수가 없게 되었다. 후에 중국에서는 양원을 죽여 우리 나라에 조리돌리었다.

 

선조 30년( 1597 정유) 9월 2일  4번째 기사

 

총독 경략 군문 및 경리 조선 군무 도찰원에 남원 함락을 보고하는 자문을 보내다

 

총독 경략 군문(總督經略軍門) 및 경리 조선 군무 도찰원(經理朝鮮軍務都察院)에 자문(咨文)을 보냈다.  “조선 국왕(朝鮮國王)은 남원(南原)이 함락당한 연유를 조사하여 보고합니다. 양 총병(楊總兵)의 근수 통사(跟隨通事) 박의성(朴義成)이 남원으로부터 달려와 말하기를 ‘성이 함락될 때에 총병은 1백여기(騎)를 대동하고 여러 겹의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갔다.

 

본도(本道)의 병마사(兵馬使) 이복남(李福男), 별장(別將) 신호(申浩), 구례 현감(求禮縣監) 이원춘(李原春) 등이 성안 길거리에서 싸우다가 지탱하지 못하여 총병 사후(總兵伺候) 정기원(鄭期遠), 부사(府使) 임현(任鉉), 판관(判官) 이덕회(李德恢), 통관(通官) 이춘란(李春蘭) 및 관군(官軍)들과 더불어 총 7백여 명이 모조리 피살되었다.’ 하였습니다.

 

한산(閑山)이 함락된 이후로 분명히 서울을 곧장 공격할 기세가 있기에, 배신(陪臣) 이원익(李元翼)은 성주(星州)에 주둔하여 추풍령(秋風嶺)· 조령(鳥嶺)· 죽령(竹嶺) 등을 막고, 권율(權慄)은 고령(高靈)에 주둔하여 좌· 우도(左右道)를 절제(節制)하고 동서의 각로(各路)를 수비, 차단하게 하였는데, 중간의 적로(賊路)가 왜적들로 가득 차 소식이 두절됨으로써 어느 성이 포위당하였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당직(當職)이 멀리 천 리 밖에서 아무리 발을 구르며 부르짖어도 형세가 서로 미치지 못하기에, 전라 병마사(全羅兵馬使) 이복남(李福男), 방어사(防禦使) 오응태(吳應台) 등으로 하여금 본도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응태는 새로 방어사에 임명되어 병사들을 미처 모집하지 못하였고, 오직 이복남만이 정예병 1천여 명을 거느리고서 적진을 뚫고 쇄도해 들어갔는데, 성안으로 들어감에 이르러서는 거느린 병사가 겨우 7백 명이었습니다. 중국 병사들과 협조하여 항전하다가 끝내는 화살이 떨어지고 힘이 다하여 마침내 함몰 됨에 이르렀습니다.

 

성에 가득한 시체가 모두 중국 사람으로서 이역(異域)에 구원나왔다가 칼날에 목숨을 잃게 되었으니, 당직은 가슴을 치고 눈물을 뿌리며 침식(寢食)을 모두 잊어버렸습니다. 이에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단(壇)을 설치하고 치제(致祭)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모두가 당직이 번병(藩屛)의 방어를 잘못하여 5년 동안이나 부진한 나머지 중국의 병사를 재차 수고롭게 하여 머나먼 외국에서 싸우며 지키게 한 데서 연유한 것으로 죄가 참으로 자신에게 있어 어떻게 스스로 열거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귀원(貴院)은 하찮은 마음의 정성을 가엾게 여기고 우리 나라의 쇠약함을 양찰하여, 미급한 점을 굽어 용서하여 곡진하게 구제해 주시면 더 이상의 다행이 없겠습니다.”

 

숙종 37년( 1711 신묘) 6월 16일  1번째 기사

 

한배주· 권이진· 송택상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고, 윤황· 윤형 등에게 시호를 내리다

 

한배주(韓配周)· 권이진(權以鎭)을 승지(承旨)로, 송택상(宋宅相)을 필선(弼善)으로, 황흠(黃欽)을 판윤(判尹)으로, 김유경(金有慶)을 설서(說書)로, 이진검(李眞儉)을 이조 좌랑(吏曹佐郞)으로, 권첨(權詹)을 부교리(副校理)로, 홍중휴(洪重休)를 수찬(修撰)으로, 이의현(李宜顯)을 경상 관찰사(慶尙觀察使)로 삼았다.

 

증(贈) 영의정(領議政) 윤황(尹煌)에게는 문정(文正), 부원군(府院君) 윤형(尹泂)에게는 충정(忠靖), 감사(監司) 증(贈) 의정(議政) 김제갑(金悌甲)에게는 문숙(文肅), 병사(兵使) 증(贈) 의정(議政) 김시민(金時敏)에게는 충무(忠武), 판서(判書) 임담(林墰)에게는 충익(忠翼), 집의(執義) 증(贈) 의정(議政) 윤선거(尹宣擧)에게는 문경(文敬), 대사헌(大司憲) (贈) 의정(議政) 정홍명(鄭弘溟)에게는 문정(文貞), 지사(知事) 원유남(元裕男)에게는 충숙(忠肅), 판윤(判尹) 이광하(李光夏)에게는 정익(貞翼), 부윤(府尹) 증(贈) 찬성(贊成)

 

황일호(黃一晧)에게는 충렬(忠烈), 수사(水使) 증(贈) 찬성(贊成) 이복남(李福男)에게는  충장(忠壯), 판돈녕(判敦寧) 이정영(李正英)에게는 효간(孝簡), 판서(判書) 윤탁연(尹卓然)에게는 헌민(憲敏), 금창 부위(錦昌副尉) 박태정(朴泰定)에게는 경헌(敬憲), 광남군(廣南君) 이광악(李光岳)에게는 충장(忠壯), 군수(郡守) 증(贈) 판서(判書) 권종(權悰)에게는 충민(忠愍), 현령(縣令) 증(贈) 판서(判書) 고종후(高從厚)에게는 효열(孝烈), 우윤(右尹) 증(贈) 판서(判書) 곽재우(郭再祐)에게는 충익(忠翼)의 시호(諡號)를 내려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