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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평읍 남차리 임창무선생묘지(曾坪邑 南次里 林昌茂先生墓地)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증평군(曾坪郡)

증평읍 남차리 임창무선생묘지(曾坪邑 南次里 林昌茂先生墓地)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9. 21. 13:50

 

 

증평읍 남차리 동점마을 군사격장 근처에 있는 애국지사 임창무선생의 자취를 찾았습니다.한번 걸음을 했지만 군사격연습중이라고 출입을 하지 못했습니다.주말을 맞아 아침에 시간내어 다녀왔습니다.

 

 

 

동점마을에서 군사격장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동네안에 도로는 차량 한대가 출입할수 있는 길입니다.조심해서 운전을 해야 합니다.차량을 이용하여 가다보면 군사격장 입구 근처에 차량을 파킹할수 있습니다.사륜구동형 차인경우에는 산소못 미쳐까지 비포장도로를 이용하실수 있습니다.지자체에서 잘 정리를 해놓았습니다.중간중간 안내판도 설치하였습니다

 

 

 

1992년 후손들에 의하여 세원진 임창무선생님의 공적비가 산소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애국지사임창무선생공적비(愛國志士林昌茂先生功績碑)라고 적혀있으며 후면에는 임창무선생의 공적내용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임창무선생(1893-1943)은 청주공립농업학교를 졸업하시고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시면서 기독교 신자로서 전라남도 광주 신흥학교로 부임하여 한문과 역사를 가르치시다가 전북 김제군 만경보통학교 교사로 자리를 옮기시었다.경술국치를 당하며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더욱 불태우게 되었다.

 

 

 

공의 나이 26세 되던 해에 기미 삼일 만세독립운동이 전국으로 불길같이 일어났다.임창무선생은 1919년 4월4일 근무하던 학교의 일본인 교장과 수석훈도가 자리를 비운틈을 이용하여 같이 근무하던 선생들과 함께 만경보통학교 학생들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불렀다.학생과 군중이 하나가 되어 만세운동을 하니 왜경이 혼비백산하였다.이 독립만세운동으로 인하여 임창무선생과 학생대표 6명은 일경에 체포되어 동년 5월14일에 군산지청법정에서 3년의 실형을 선고받았으나 공은 판결의 부당성을 주장하고 상고하여 2년형으로 감형을 받게 된다.대구형무소에서 2년의 형기를 치루었다.옥고를 치른 후 증평으로 귀향하여 목재상을 경영하시다가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3년 4월17일 향년 52세로소천하시었다.공의 이러한 독립운동으로 1990년 건국훈장애족상을 정부로 부터 수여받았다.[공적비내용참조]

 

공적비의 내용과 군지등에 실린 내용이 조금은 오차가 있다.공적비의 내용을 적었다.

 

 

 

 

 

산소는 후손들에 의하여 세워진 공적비와 상석 그리고 망주석2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4월 4일 만경장날에는 만경공립보통학교 훈도·생도들을 중심으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임창무·오연길·장태석·이석재 등은 일찍부터 독립정신을 동기생에게 전했고 익산군 오산면 애국지사 문용기 등과 비밀 연락을 취했다.4일 정오께 임창무가 3·4학년 생도 모두를 교정에 불러 모아 “전국 각지에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우리도 동참해야 한다”며 태극기를 들고 앞장서 독립만세를 부르니 100여명이 모두 대열에 합류해 독립만세를 부르며 뒤따랐다.임창무의 만세대열이 시장에 나가자 수백명이 합세해 만세를 불렀다.순찰 중이던 순사와 승강이가 벌어지기도 했지만 만세대열은 한참동안 시장을 돌며 진행됐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김제경찰서 무장대가 출동해 폭력을 행사하며 제지했고, 결국 대열은 해산되고 주동인물인 임창무 등이 붙잡혔다.

계속되는 독립만세운동은 더욱 강화되는 일본 경찰의 탄압에 의해 좌절됐다. 그러나 애국지사와 애국동포들의 독립염원·구국의 활동은 계속됐다.
[2019.3월 전북일보]

 

 

 

 

 

 

 

공적비에는 고향이 충남병천에서 태어난것으로 기술되어있다

 

임창무는 1893년(고종 30) 11월 6일∼1944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 충청북도 괴산읍(槐山邑) 증평면(曾坪面) 증평리(曾坪里) 925에 태어났다. 독립운동 당시의 주소지는 전라북도 김제군(金堤郡) 만경면(萬頃面) 만경리(萬頃里)이다.

1919년 그는 당시 만경공립보통학교의(萬頃公立普通學校) 훈도로 학생들에게 독립정신을 고취시켜주기 위해 익산군(益山郡) 오산면(五山面)에 있던 애국지사 문용기(文鏞祺)와 비밀연락을 취하며 4월 4일 만경 장터에 장이 열리는 날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였다. 4월 4일 정오가 되자 그는 3∼4학년 학생들 백여 명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할 것을 권유하고 학생들 앞에 서서 거리행진을 벌이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일본 경찰이 출동하여 그와 학생들을 체포해 갔다. 1919년 5월 14일 대구복심법원에서 보안법(保安法) 위반 혐의로 2년형이 언도되어 1년간 옥고를 치루고 나왔다. 1944년 양력 5월 21일 생을 마감하였다. 1982년에는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으며, 1990년에는 애족장을 포상하였다.

자료에 따라 2년간 옥고를 치른 것으로 되어 있기도 하나, 『동아일보(東亞日報)』 1920년 7월 14일 기사에 따르면 그는 보안법 위반으로 대구 감옥에서 1년간 고생하다 출옥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에 따라 그가 옥고를 치른 기간은 1년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유물로 「임창무 등 판결문」이 있는데, 그와 만경공립보통학교 4학년 학생 6명에 대한 대구복심법원의 판결문으로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이다.[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