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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암동 폭서암(壯岩洞 曝書巖) 본문

통합청주시/서원구(西原區)

장암동 폭서암(壯岩洞 曝書巖)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11. 12. 14:26




연꽃이 한창일 때에 장암지에 조성된 연꽃방죽을 구경하고 가까이 있는 曝書巖을 찾으면 참 좋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가을이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장암동의 폭서암의 풍경이 참 좋다.

민가가 들어서고 주위환경이 많이 바뀌웠지만

전에는 한 여름에 냇가에서 천렵도 하고 가족단위의 피서지로도 참 좋았겠다 하는 생각이 드는것이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오래전에 찍어둔 연꽃방죽이다]



커다란 바위에 힘있는 필체의 글자가 교하인 노긍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가경(嘉慶)무진 하(戊辰 夏)면 1808년이다.1808년여름에 이글을 새겼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위에 새겨진 글자를 조합하여 보면

바위에 “한원(漢原) 노선생(盧先生) 폭서암(曝書巖) 문인(門人) 황득효가 기록하다(黃得孝書) 가경 무진(1808년) 여름(嘉慶 戊辰 夏)”이라
내용을 새겼다.노긍이 죽은지 거의 20여년후에 노긍을 그리며 그의 문인인 황득효가 이 글을 새겼을거다.





폭서암(曝書巖)이라 하였다.

폭서암과 관련이 있는 인물은 교하인 노긍이다.

노긍(盧兢. 1738-1790)은 본관은 교하()이며, 초자는 신중(), 자는 여림(), 호는 한원()이다. 아버지는 진사 노명흠()이다.



영조() 때 영의정이었던 홍봉한이 청주목사로 재직할 당시인 1742년(영조 18)에 실시된 청주 백일장에서 6살의 나이로 장원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홍씨 일문의 자손들과 교유하게 되었다. 1765년 진사가 되었는데, 과시에서 명성을 떨쳐 호서지방 사류들의 추앙을 받았다. 향중 자제를 모아 강학을 하는 한편 시문에 능하여 관직에는 큰 뜻을 품지 않았다.

1777년(정조 1) 사간 이현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여론을 조성, 사풍()을 어지럽히는 인물이라 하여 경중()의 고봉환(), 개성의 이환룡(), 호남의 이행휘() 등과 함께 먼 변방에 유배시킬 것을 상소하자, 이로 인하여 위원()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났다.

만년에는 효로써 모범을 보였고, 부자가 모두 과시()로 이름을 떨쳤다.한문소설「화사()」를 지었다. 문집으로 『한원집()』이 있다. 그 외 시가 도처에 전하고 있다.





이가환은 <노한원묘지명>에서 다시 이렇게 노긍을 회고한다.



노긍은 기억력이 뛰어나 고금의 서적을 한 번 보기만 하면 대략 외울 수가 있었다. 특히 시무에 밝아 당대 인재의 높고 낮음과 어느 자리에 누가 마땅한지 하는 판단과 국가 계획의 좋고 나쁜 까닭을 하나하나 분석하매 모두 핵심을 찔렀다. 만약 그를 써서 일을 맡겼다면 반드시 볼만한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근근히 문인으로 행세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요컨대 총명하고 명민함은 상민열(桑民悦) 같았고, 널리 경사(経史)에 해박하기는 진명경(陳明卿) 같았다. 기특한 재주와 높은 의리를 지녀, 오만하고 도도하며, 몸은 곤액을 당하였지만 이름이 널리 알려진 것은 서문장(徐文長)과 흡사하였다. 예전 원중랑(袁中郎)이 서문장을 평하여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가슴 속에는 마멸시킬 수 없는 한 가닥 기상이 있었으되, 영웅이 길을 잃어 발붙일 문조차 없는 슬픔을 지녔다. 그래서 그 시는 성난 듯 비웃는 듯 하였다. 물이 계곡에서 울부짖는 것 같고, 쇠북이 땅 속에서 나온 듯 하였다. 과부가 한 밤중에 곡을 하는 것 같았고, 떠도는 나그네가 추워 일어나는 것 같았다.” 식자들은 원중랑이야 말로 서문장을 알아준 환담(桓譚)이라고 말했다. 애석하도다. 노긍을 알아줄 환담은 어디에도 없구나.

시무를 논하면 문제의 본질을 꿰뚫었고, 총명하고 해박함은 어떤 인물에도 뒤질 것이 없었다. 세상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능력을 인정했고, 그 스스로도 자부했다. 높고 큰 뜻을 품었으되, 그에게 주어진 일은 나라를 위해 경륜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부잣집 과외선생에다 과거시험 답안지 대필의 소임뿐이었다. 그나마 입에 풀칠하자고 권문(権門)에 수십 년 식객 노릇을 하다가 돈 받고 시험 답안지 팔아먹은 놈이란 더러운 이름을 뒤집어쓰고 귀양살이를 했다.

한나라 때 양웅(揚雄)은 실의의 낙담 속에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태현경(太玄経)》을 남기고 죽었다. 하지만 환담(桓譚)만은 그의 대단한 학문을 알아주고 인정했다. 불우하게 죽은 천재 문인 서문장(徐文長)은 또 사후이긴 해도 그를 알아준 원중랑(袁中郎)을 만나 후세에 썩지 않을 이름을 남겼다. 이가환은 글 끝에서 노긍이 죽은 뒤에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으므로 자신이 환담의 역할을 맡겠노라고 했다. 사실 이가환의 이 글이 아니었다면 노긍은 역사에 이름조차 남기지 못했을 것이다.








당시의 조정은 시파와 벽파로 나누어 서로를 견제하며 탄압하던시기였다 

시파와 벽파는 조선 영조 때 장헌세자(사도세자)의 폐위와 사사()를 둘러싸고 분열된 파당이다.

무고를 받아 뒤주 속에서 굶어죽은 세자를 동정하는 입장이었던 시파는 대부분 남인 계통이었으며, 세자를 공격해 자신들의 무고를 합리화하려고 했던 벽파는 대부분 노론이었다. 그러나 노론 중에서도 시파가 있었으며 같은 친족간에도 시파와 벽파가 나뉘어지는 등 4색당파는 사실상 해체되고 붕당은 이 두 파로 나누어져 정권을 둘러싼 대립을 계속했다. 장헌세자에 대한 비판과 동정도 정치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명분이라는 성격이 강했다.

정조가 즉위 후 노론 위주의 정국에서 탈피해 왕권을 강화하려 했을 때 시파는 이에 지지를 표했다. 시파라는 이름도 시류()의 이러한 흐름에 편승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이다. 양 파의 대립에서는 이전의 4색당파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과 같은 붕당정치의 긍정적 측이면은 거의 사라지고 정권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다툼만이 계속되었다. 순조 즉위 후 일어난 천주교 탄압인 신유박해의 경우, 천주교 전통적인 유교적 사회질서를 파괴할까 염려했던 측면도 있었으나 천주교를 연구하는 학자나 신자 중에 시파가 많았으므로 당시 정권을 잡은 벽파가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당시의 노긍은 시파로서 득세하고 있던 벽파들의 견제로 중앙무대로 진출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시기였다.







장수바위 옆에는 개인의 기도처인지 작은 기도처가 자리하고 있다.

향로도 있고 작은 제단도 있는것으로 보아 기도처인 것이 분명하다.접근성은 그리 좋치 않으며 연결된 구름다리는 인가와 맞닿아 있다.





안내판에 써있는 설명문을 보면  “‘노긍’이라는 사람이 이 바위 위에 정자를 세우려고 그 바위를 덮고 있는 뚜껑처럼 생긴 바위를 옮기려하자 난 데 없는 뇌성벽력이 일어 정자 세우는 일을 중지했다고 하는 대목이 있다.

혹시나 하고 바위 위로 올라가 보니 아담한 정자가 어울리는 작은 평지가 자리하고 있다.
작은 정자 지어 흐르는 물소리 벗 삼아 책을 읽고 시대를 논한다면 참 안성맞춤이겠다 하는 생각을 했다.
정자를 짓지못한 이쉬움을 그리 말로 달래지 않았을까 하는 혼자만의 생각을 해본다.



노긍은 글을 쓰면서 비유와 은유를 잘 하였던것 같다.

아들의 동해의 유배생활을 동해해돋이 구경이라고 썼으며  아들인 면경이 죽은 지 사흘만에 죽은 며느리 신씨를 위한 묘지에서는 시아버지가 귀양을 떠나고 시어머니 마저 죽은 다음 며느리가 집안을 간수하는 모습을 "갓난아이(노긍의 막내아들)는 어미를 잃고 잘 울어서 늘 등에 업고 서 있어야 했기에 등에서는 구더기가 생길 지경이었으니 신씨는 어머니였지 형수가 아니었다"라고 적고있다.

죽은 아내의 묘지에서는 "아내는 열여덟에 자식을 가져 사십에 죽었다. 아내가죽은 지 석달만에 노긍은 벼슬아치도 아닌 사람이 관서 땅 변방으로 귀양을 떠났다. 7년만에야 돌아왔으나 고생과 재앙은 심하고도 매서웠다. 그렇지만 한씨는 아무 것도 듣지를 못하였으니 복받은 사람이다"라는 말로 애도를 승화, 극화하고 있다.


노긍 글쓰기의 파격은 자기 집에서 봉사하다 죽은 늙은 종 막돌이의 제문을 썼을 때 극에 달한다. 종을 위해 주인이 제문을 쓰는 일은 아주 희귀하다.

‘막돌이의 아비는 지난 20년간 언제나 내 말고삐를 잡고 따라 나섰던 하인이었다. 길에서 죽은 그의 아비를 남원 만복사에 묻고, 그의 어미와 형이 다시 나를 섬기다 세상을 뜬 뒤 막돌이마저 자식 없이 죽으니, 이제 우리 집에서 채씨의 씨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게 되었다. 여섯 살에 고아가 된 너를 내 아내가 거두어 길렀고, 아내가 세상을 떴을 때 너는 그 은공을 잊지 못해 비쩍 마른 원숭이처럼 끽끽 울며 괴로워했다. 또 우리 부자가 재앙을 만나 평안북도 위원 땅과 강원도 간성 땅에 각기 귀양가 있을 때에도 그 먼 길, 그 고통을 마다 않고 발바닥이 갈라지고 이마가 벗겨지도록 왕래하며 심부름을 해 주었었다. 내 집에서 지낸 그 어느 하루도 너에겐 편안한 날이 없었다. 언제 실컷 잠 한 번 자본 적이 있으며, 언제 콧노래 한 번 불러본 적이 있었더냐. 명색 주인된 자로서 나는 이것을 깊이 부끄러워한다.


아아! 막돌아. 이제 편히 눈을 감으려므나. 이제 지하에 들어가 평생에 지친 몸을 누이면, 먼저 간 네 부모와 네 형, 내 아내와 내 동생이 널 보러 달려올 테지. 그리하여 다투어 나는 어찌 지내고 있더냐고, 그 사이에 다른 변고는 없었느냐고 물어볼테지. 그러면 너는 이렇게 대답해다오. “네. 주인님은 요즘 온 몸 어데고 안 아픈 데가 없습니다. 이빨은 흔들리고, 터럭 위엔 흰 눈이 내렸습지요. 이런 저런 세상 시름에 찌들어 벌써 늙은이가 다 되어 버린걸요.” 그러면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며 얼굴빛이 변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나를 불쌍히 여길 것이다. 아아! 막돌아. 이제 나 혼자만 이렇게 남았구나.‘








안내판에 써있는 曝書唵이라는 한문을 曝書巖으러 고치던지....

한번만 이 곳을 방문한다면 저런 실수는 하지 않을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