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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일면 신송리 체화당사사적비(南一面 新松里 棣華堂祠事蹟碑) 본문
교하노씨는 청주의 팔대성의 하나로서 가산리와 신송리에 많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교하노씨의 시조는 노오(盧塢)로서 교하백(交河伯:경기도 파주)으로 봉작을 받은 것이 본관의 시원이 된다. 중시조는 11세 경원군 노은(盧訔)으로 경원군파(慶原君派)를 형성하였고, 경원군파 계열의 15세손인 해동처사 노유근(盧有謹)이 1454년(단종 2)에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 원골마을로 복거하면서 입향조가 되었다. 낙향을 하게된 것은 계유정란(1453) 당시 피살된 영상 황보인과는 외척관계로 연좌를 피하려는데 연유한다.
속칭 ‘머뫼노씨’라 부르는 것은 세거한 동네의 산이 말의 멍에처럼 생겼다하여 멍에산이 변환되어 ‘머뫼’ 또는 ‘머미’라 부르게 되었고, 지명을 한자로 표기하여 가산리(駕山里)라 하였다는 것이다. 집성촌으로 남일면 일원에 300여 호, 신송리 인근에만 200여 호가 살고 있었던 대족으로 선조인 노계원(盧繼元) 등 4형제를 배향하는 체화당(棣華堂) 서원이 있다.
체화당사는 조선 중기 선조 때 선비인 교하 노씨의 4형제 노계원·노준원·노종원·노일원의 위폐를 모신 사당이다.
『증보문헌비고』의 기록에 따르면 영의정(지금의 국무총리) 유성룡(1542∼1607)이 이들 4형제의 남다른 우애와 효성이 지극한 것을 보고 선조에게 말씀드리니 선조가 친히 체화당이란 글씨를 써서 그 집에 걸도록 하였다.
숙종 27년(1701)에 후손들이 남일면 가산리에 사당을 세우고 체화당사라고 이름하였으나 고종 때 철폐되었다. 그 뒤 1967년에 후손들이 지금 있는 자리에 사당을 다시 짓고 사적비도 옮겨 놓았다.
건물 규모는 앞면 3칸·옆면 2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사당 앞에는 이우겸이 짓고 성영이 써서 숙종 45년(1719)에 세운 체화당사적비가 있다.
형제애가 남달랐던 노씨(盧氏) 사형제가 살았던 집인 체화당(棣華堂)의 사적을 적은 비문이다.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우겸(李宇謙)이 시말(始末)을 기록하고, 사인(士人) 성구(成球)가 글씨를 써서 비석에 새겼다. 청주(淸州) 남가산(南駕山) 아래 살던 계원(繼元), 후원(後元), 종원(從元), 일원(一元) 등 사형제의 미담이 세상에 알려지자 선조(宣祖)가 이를 듣고 유성룡(柳成龍)을 보내 실정을 알아보게 한 후, 이들의 형제애를 기려 친히 체화당(棣華堂)이란 글씨를 써서 편액을 하사하였다. 임진왜란 후에 이들 형제의 집터가 불타 종적을 찾을 수 없게 되자 후손들이 선조(先祖)의 행적이 묻혀져 버릴까 우려하여 당(堂)을 중건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노씨 사형제의 행적과 함께 조선조에서 효행과 형제간의 우애를 권장했던 실제를 보여 주는 자료이다.
棣華堂事蹟碑
堂以棣華名 志盧氏兄弟式相好之誼也 盧氏本吾東名族 居于淸之南駕山下 長諱繼元 次諱後元 次諱從元 文科 李諱一元 兄弟四人 同處一室 朝於斯 夕於斯 白首如一日 信天下之至樂也 觀者愛慕聽者敬歎 西崖柳相國 自嶺赴召歷訪四公留數日不忍離 及入待 遂以實白 我宣廟 特嘉之 手書三字俾揭于堂之額 窮閻下屋 星斗昭回 豈特盧氏一門之榮 實爲靑史百世之光 當時風化之盛 於斯可見矣 猗歟美哉 不幸壬辰兵燹之後 遺墟荒涼 殆不可復識者 于今百有餘年 行路 亦皆咨嗟矣 近辛巳歲 其後孫會唐 與肅 厚址 再章 以鏡 協力重建 竭誠敦事 其克家之風 固可謂有自而然 而前後事實 適無槪見於文字 不侫深恐其久而泯沒 謀於盧氏諸君子 鳩財治碣略記始末 聖祖勵世之典 盧氏孝友之行 庶自此復彰 而亦或有補於末路之矜試云爾
崇禎紀元後 92年 四月 日 淸州牧使 李宇謙 敬識
士人 成球書
체화당사적비(棣華堂事蹟碑)
당(堂)의 이름을 체화(棣華)로써 이름한 것은 노씨(盧氏) 형제가 서로 사이좋게 지내는 정의(情誼)에 뜻을 두어서이다. 노씨(盧氏)는 본래 우리 동방의 명족(名族)인데 청주(淸州)의 남가산(南駕山) 아래에서 살았다. 큰아들 휘(諱) 계원(繼元), 둘째아들 휘 후원(後元), 셋째아들 휘 종원(從元), 넷째아들 휘 일원(一元) 등 형제 네 사람이 한 방에 함께 거처하며 아침저녁으로 함께 지내기를 백발이 될 때까지 하루같이 하였으니 천하의 지락(至樂) .
을 믿은 것이다. 보고 듣는 자들이 애모(愛慕)하고 경탄(敬歎)하였다.
서애(西厓) 유 상국(柳相國)이 영남(嶺南)에서 임금의 부름을 받고 나아와 네 분 공(公)을 차례로 방문하고 며칠을 머물며 차마 떠나지 못하였다. 입시(入侍)함에 미쳐서 마침내 실상대로 아뢰니 우리 선묘(宣廟)께서 특별히 가상하게 여겨 손수 세 글자를 써서 당(堂)의 편액(扁額)으로 걸게 하였다. 궁벽한 마을의 아랫사람 집에 임금의 밝으신 돌보아 주심이 있게 되었으니 어찌 다만 노씨(盧氏), 한 가문만의 영광이겠는가. 실로 청사(靑史)에 길이 남을 광영(光榮)이며 당대(當代)에 교화(敎化)가 성대하게 이루어졌음을 여기서 볼 수 있으니, 아아, 아름답도다.
불행히 임진년(선조 25, 1592년)의 병란이 있은 후에 네 분이 살던 옛터가 황폐하고 썰렁해져 자못 다시 알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지금까지 백여 년이 흘렀는데 행로(行路) 또한 모두 한탄스럽기만 하다. 근래 들어 신사년(인조 19, 1641년)에 그 후손인 회당(會唐), 여숙(與肅), 후지(厚址), 재장(再章), 이경(以鏡)이 협력하여 중건(重建)하고 정성을 다해 두터이 섬겼으니 그 집안을 다스리는 풍도(風度)가 참으로 자연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전후의 사실은 문자로 대강이나마 나타나 있는 것이 없는 형편이다. 불녕(不佞)이 시일이 오래 지나면 그 사실마저 없어져 버릴까 깊이 두려워하여 노씨(盧氏) 가문의 여러 군자들과 상의하여 재물을 모아 비석을 만들고 시말(始末)을 대략 기술하여, 거룩한 조상이 세상을 권려(勸勵)한 가르침과 노씨의 효우(孝友)의 행실을 이로부터 다시 뚜렷하게 밝히니, 또한 말세에 삼가 본보기로 삼는 데에 혹 보탬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숭정기원후 구십이년(崇禎紀元後 九十二年) 4월 일 청주 목사(淸州牧使) 이우겸(李宇謙)이 삼가 기록하다.
사인(士人) 성구(成球) 가 글씨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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