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맹동면 군자리 김종립묘소(孟洞面 君子里 金宗立墓所)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음성군(陰城郡)

맹동면 군자리 김종립묘소(孟洞面 君子里 金宗立墓所)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19. 12. 17. 17:52

 

 

겨울비가 내린다

추적추적거리는 겨울비새로 차를 몰아 새로 단장했다는 군자리를 찾았다.

군자리는 동네의 이름의 유래를 의성인 군자감 김종립이 이 곳에 터를 잡으며 생겼다고 한다.

 

 

이번에 김종립충신각을 새로 보수하면서 다른곳에 있던 김종립의 묘소도 충신문위로 새로 이장을 한 듯 하다.

새로 조성하여 잔디도 새로 입히고 나름 진입도로도 닦아 놓았다.

 

 

자연 마을로는 1970년대 말까지 군자터와 방아실 등의 2개 마을이 있었으나 현재는 군자터 1개만 있다. 통동리 저수지의 축조로 군자터의 점말과 점말의 옻샘·터골 등은 수몰되었다. 통동리 저수지는 수심이 깊고 저수지의 상류를 연결하는 도로가 있어 낚시터로의 진입은 용이하다. 문화 유적으로는 군자터에 충신 김종립(金宗立) 충신각이 있다

 

 

김종립은 조선 중기 충청북도 음성군 출신의 무신이다.
김종립(金宗立)[?~1636]은 1624년(인조 2)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봉사(軍資監奉事)에서 주부에 이르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진천현 초관(哨官)으로서 충청감사 정세규를 따라 광주(廣州) 험천(險川)에서 적과 싸우다가 대패하였다.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정세규를 찾으려 할 때 한 장교가 “지금 나와 같이 도망하여 이 위급을 피하자”하였으나, 정색하며 “네가 만일 도망을 가면 내가 먼저 너를 죽일 것이다”하면서 남은 병사를 정돈하여 분신전진(奮身前進)하다가 중과부적으로 전사하였다.

 

현감 이충운(李翀雲)이 시를 지어 애도하기를, “목숨을 가볍게 여기는 처음 뜻은 그대와 내가 같았으나/ 손에 붓대 잡고, 허리에 활을 차는 데서 재주는 달랐도다/ 그대가 나라 일에 죽을 때에 나는 구차하게 살았으니/ 남을 향해 뜻이 서로 같았다고 말하기 부끄럽네”라고 하였다.

진사 채진형(蔡震亨)이 전기(傳記)를 지어 김종립의 충절을 자세하게 기록하였으나 조정에서의 포상이 없었다. 1704년(숙종 30) 손자 김문상이 상언하자, 조정에서 김종립의 충절을 인정하여 정려(旌閭)를 명하고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使)에 증직하였다. 이듬해인 1705년(숙종 31)에 충청북도 음성군 맹동면 군자리에 ‘충신정려문’을 건립하였으며, 권상하(權尙夏)가 묘갈명을 찬하였다.

 

 

증가선대부선무랑군자감주부중추부사의성김공종립지묘(贈嘉善大夫宣務郞軍資監主簿中樞副使義城金公宗立之墓)라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