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명(有明) 조선국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행선무랑 수사간원정언 유공(柳公)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幷書)
아우 충근정량표절협책치성효충분의병기익사 공신 보국숭록대부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유근(柳根) 짓다. 가선대부(嘉善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김현성(金玄成) 쓰다. 가선대부(嘉善大夫) 경기 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 개성부 유수 유희량(柳希亮) 전각하다.
우리 백씨(伯氏) 정언(正言) 공은 만력(萬曆) 갑신년(선조 17, 1584년)에 세상을 떠 괴산(槐山)의 선영 뒤에 장사 지냈다. 정사년(광해군 9, 1617년)과 갑신년 사이의 거리가 34년인데, 그 아우 근(根)은 이제야 비로소 돌에다 명(銘)을 새기니, 감히 미적거렸던 것은 아니로되 대개 기다리는 바가 있어서였다. 만력 을사년(선조 38, 1605년)에 백씨에게 승정원 도승지가 추증(追贈)되었는데 둘째 아들 시행(時行)이 선무공신(宣武功臣) 원종(原從) 일등 공신에 들었기 때문이다. 불초 아우 근(根)은 외람되이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들었다. 백씨는 호성공신 원종 2등에 추록되고 인하여 이조참판에 증직(贈職)되었다. 장남 시회(時會)는 선무 원종 1등에 들었으며, 이에 더하여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갑인년(광해군 6, 1614년)에는 의정부 좌찬성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로 여러 차례 증직되었으니, 아마도 시회(時會)가 위사(衛社) 및 향난(享難) 원종(原從) 1등 공신에 들었기 때문인 듯하다. 아아, 성스러운 조정에서 명을 내리심이 이에 미쳤으니, 어찌 두 아들과 한 아우가 능히 이룰 수 있는 바이겠는가. 백씨께서 선(善)을 행하신 것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 보답을 받는 것이리라. 백씨의 휘(諱)는 격(格)이고, 자(字)는 정부(正夫)이니 진주(晉州) 유씨(柳氏)이다.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 정(挺)이 시조이며 몇 대를 거친 후에 금자광록대부문하시랑 동중서 문하불평장사 판리사 행 은자광록대부 추밀원 부사홍림 광정대부 도첨의찬성사 판민부사 상호군 양화공(良和公) 욱(栯)이 나왔다. 그 후에 이름이 알려진 사람으로 5세인 휘(諱) 종식(宗植)이 가정대부(嘉靖大夫) 공조참판을 지냈는데 이분이 휘 영정(永貞)을 낳았으니 즉 우리 고조이신데 일찍 돌아가셨다. 백부(伯父) 형조참판공인 휘 창문(昌門)이 가정(嘉靖) 을축년(세종 20, 1565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제수되었고 사복시 정(司僕寺正)에 증직되었다. 고조의 비는 사천 목씨(泗川睦氏)인데 숙인(淑人)에 증직되었다. 증조의 휘는 팽수(彭壽)인데 한성부 참군(參軍)을 지냈으며 백부가 현귀(顯貴)해져서 이조참의에 증직되었다. 불초 증손 근(根)은 재주가 없는 데도 진원군(晉原君)에 봉해졌으며 여러 차례 이조참판과 이조판서에 증직되었다. 증조모 권씨(權氏)는 좌사간(左司諫) 지(枝)의 따님이자 예문관 제학(提學) 매헌(梅軒) 우(遇)의 손녀로 정부인(貞夫人)에 증직되었다. 사간의 묘는 괴산 수진촌(水津村)에 있다. 증조고의 약비(若妣)는 처음에 같은 군 몽촌(夢村)의 영등산(永燈山)에 장사 지냈다. 조부의 휘는 윤(潤)인데 예빈시(禮賓寺) 별제(別提)를 지냈으며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조모는 진주 강씨(晋州姜氏)로 정부인에 증직되었는데 백부의 은혜를 미루어서 그런 것이며, 사헌부 감찰 세홍(世弘)의 따님이고 겸 동북면도순문사통정(兼東北面都巡問使通亭) 회백(淮伯)의 후손이다. 선군(先君)의 휘는 영문(榮門)이고 자(字)는 여숙(與叔)인데 성균관 진사를 지냈다. 증손 적(頔)이 정정옹주(貞正翁主)에게 장가들어 진안위(晉安尉)가 되었으며 통훈대부(通訓大夫) 사복시 정에 증직되었다. 불초자 근(根)은 선군의 종제(從弟)에게 출계(出系)했는데 유명(遺命)을 따른 것이었다. 추증(追贈)의 은전은 본생부모(本生父母)와 본생 조부모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 모친의 집안은 죽산 안씨(竹山 安氏)인데 숙인(淑人)에 증직되었다. 고(考)의 휘는 세언(世彦)인데 이조 정랑을 지냈으며 삼중대광문하찬성사 판호조사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이며 시호가 양양공(襄良公)인 한평(漢平)의 후손이다. 선비(先妣)는 문화 유씨(文化柳氏)인데 성균관 사성(司成) 의신(義臣)의 따님이다. 백부 흥선군(興先君)은 일찍이 조 선생(趙先生) 성(晟)의 문하에 유학하여 흥청천(興聽天) 심 상공(沈相公) 수경(守慶) 등 여러 공들과 함께 배웠다. 선군(先君)은 행실과 덕이 지극하고 후했으며 부모에게 효성스럽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었으며 벗들에게 믿음성이 있었다. 종족과 친구들은 날마다 그가 벼슬길이 트여 그 덕택에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랐다. 모친의 집안에는 부인들 가운데서도 사군자(士君子)의 식견을 가진 분이 있었는데, 모부인이 경사(經史)에 널리 통달하였고 사리에 밝아 모부인에게 얻어 배운 것이 많았다. 9세에 정랑(正郞) 공이 어머님을 잃었는데, 두 아들이 모두 어질고 영리하였다. 삼년간 한결같이 제사를 받들었는데, 모부인이 모친에게 제사를 주관할 것을 명하였으니 『시경(詩經)』 ‘채빈(采蘋)’에서 이른바, 재계녀(齋季女 : 제사를 주관하는 나이 어린 종부<宗婦>)의 역할을 한 것으로, 진실로 세상에서 드물게 있는 일이었다. 나중에 며느리로 가문에 들어오자 대부인께서 가장 사랑하며 아꼈다. 백부 공께서는 항상 선군에게 말씀하시기를 “대부인은 제부(弟婦)로서 심히 마땅한 인물이니 한 가문의 다행이다.” 하였다. 가정(嘉靖) 을사년(인종 1, 1545년) 2월 9일에 백씨를 낳았다. 대부인께서 몹시 기뻐하며 항상 “이 아이가 마침내 우리 가문을 세워 일으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백부 참판 공은 을사년의 화를 입어 탄핵을 받고 이조 정랑에서 삭출되었다. 계축년(명종 8, 1553년)에 서용(敍用)되어 우봉현(牛蜂縣)의 현령(縣令)으로 있다가 온양 군수(溫陽郡守)로 옮겼다. 병진년(명종 11, 1556년) 5월 1일에 대부인이 세상을 떴다. 선군은 백부를 따라 영등천(永燈阡)에서 여묘살이를 하였다. 선군은 집상(執喪)을 제도에서 정해진 기한을 넘겨 이듬해 6월 14일까지 하시다가 마침내 상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모친은 서울에 계셨는데 부음이 이르자 모친은 곡을 하고 가슴을 치며 하늘을 부르짖다가 기운이 끊어진 적이 여러 차례였다. 백부는 선군을 선영의 서쪽 자락 계좌정향(癸坐丁向)의 언덕에 장사 지내고 서울에서 반혼(返魂)을 하였다. 이때 백씨의 나이가 겨우 열두 살이었고, 근(根)은 아홉 살이었다. 참봉 남경철(南景哲)의 아내가 된 누이동생은 겨우 세 살이었다. 모친은 겨우 눈만 뜨고 숨만 쉴 뿐이었고 슬하에는 우리 삼남매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통을 견디며 가난을 편안히 여기며 우리를 기르고 가르쳤다. 백씨는 거친 삼베옷을 입고 거친 음식을 먹으며 아침저녁으로 곡을 하고 전(奠)을 올리기를 한결같이 성인처럼 하였다. 우리 형제는 모친을 우러러 의탁하며 자라났다. 융경(隆慶) 무진년(선조 1, 1568년) 증광시(增廣試)에서 백씨는 진사에 합격했다. 경오년(선조 3, 1570년)에 근(根)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했다. 임신년(선조 5, 1572년) 봄에 근(根)은 외람되이 대과(大科)에서 장원을 하였다. 만력(萬曆) 경진년(선조 13, 1580년) 2월 알성시(謁聖試)에서 백씨는 을과(乙科)에 급제하였다. 근(根)은 다리에 병이 있어 정언(正言)에게 알리고, 좌석에 기대 있었는데, 홀연 기쁜 소식을 듣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나서면서도 깨닫지 못하였다. 말을 타고 집에 가서 모친에게 아뢰자 모친은 밤새도록 슬퍼하고 또 기뻐하며 잠을 이루지 못하시면서 조용하게 근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이미 다행히 성년이 되어 관직에 진출하였다. 이제 너의 형도 또 과거에 급제하였으니 내가 너희 아버지를 미처 따라 죽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 너희 형제가 입신양명하는 것을 보니 지금 죽더라도 무슨 유감이 있겠는가.” 하였다. 근(根)은 다음 날 새벽에 급히 나가서 출사(出謝)하여 이날 창방(唱榜)을 하였다. 은영연(恩榮宴)을 베풀어 모친을 경석(慶席)에 모셨다. 얼마 있지 않아 모친이 병환에 걸려 4월 2일에 결국 세상을 뜨셨다. 백씨는 마음으로 다짐하기를 마침내 녹봉을 받아 모친을 봉양하게 될 것을 기약하였는데 갑자기 망극한 고통을 안게 되자 하늘에 부르짖으며 숨이 거의 끊어질 듯이 하여 스스로 억제하지를 못하였다. 초상(初喪) 때부터 물과 장 등을 입에 대지 않았으며 지팡이를 짚고서도 일어서지 못할 정도였다. ~ 몇 자 해독 불능 ~ 선묘(先墓)의 좌측에 부장(祔葬)하였다. 마침내 불초 아우가 묘 옆에서 여묘살이를 하게 되었다. 백씨는 앞서 부친상을 당하여 어렸을 때 혈기를 손상함이 이미 심했는데, 이번 상에서는 더욱 정성을 다하였다. 항상 국물만 마시며, 기식(氣息)과 근력(筋力)이 받쳐 주지 못함은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처음에는 졸곡(卒哭) 후에는 현미밥을 먹겠다고 하였으나 소상(小祥)이 자나도록 여전히 변치 않았다. 친척들이 오고가며 말렸으나 뜻을 돌리지 못하였다. 그렇게 삼 년이 지났다. 불초 아우는 경진년 겨울에 후사를 맡긴 부친의 병이 위중하다는 것을 듣고서 부축을 받으며 가서 뵈었다. 12월 7일에 불행히 대고(大故)를 당하였다. 신사년(선조 14, 1581년) 봄 얼음이 반쯤 녹았을 때 혈혈단신으로 물가를 따라 수로(水路)를 경유하여 몽촌(夢村)의 오른쪽 산등성의 선영에 길지를 잡아 장사 지냈다. 후사를 맡긴 모친이 집에 계셨기 때문에 만리현(萬里峴)의 선려(先廬 : 조상 대대로 살아 온 집)에서 반곡(返哭)을 하였다. 모친의 궤연(几筵)은 백씨 혼자서 정성스레 받들었다. 불초 아우는 실낱같은 목숨을 부지하며 분주하게 왕래하는 사이 초췌함이 날로 심해져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되었다. 백씨는 밤낮으로 아우를 걱정하느라 노심초사하며, 정성을 다하였는데 그러는 사이 백씨 자신의 원기가 안에서부터 삭아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알지 못하여 마침내 고치기 어려운 병을 만들고야 말았다. 임오년(선조 15, 1582년) 여름에 상기(喪期)를 마치고서부터 갑신년(1584, 선조 17)까지 약과 온갖 약과 침으로 병을 다스렸으나 끝내 효과를 보지 못하였다. 마침내 그해 5월 2일에 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니 나이가 겨우 40이었다. 무슨 말을 차마 할 수 있으랴, 무슨 말을 차마 할 수 있으랴. 백씨는 품부받은 자질이 순후(醇厚)하고 어려서부터 숙성하였다. 집에 들어와서는 모친의 가르침을 받들고 나가서는 유익한 벗을 사귀었다. 효도의 마음이 지극하여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급선무로 삼긴 하였으나 이치를 밝히고 몸을 검칙(檢飭)하는 학문에 대해서도 일찌감치 알았다. 말은 어눌하였으나 선(善)을 좇는 데는 민첩하였다. 태학(太學)에서 공부할 때 훌륭한 소문이 자자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충성과 신의가 있는 사람으로 여겨 더불어 사귀고자 하는 자가 날마다 대문 앞에 줄을 섰다. 포의(布衣)의 신분일 때 이미 명성이 났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선릉 참봉(宣陵參奉)에 제수되어 갈옷을 벗었으며 괴원(槐院)에 선발되었다. 복제 기간이 끝나자 예문관 검열(檢閱)에 천거되어 제수를 받았다가 시강(侍講)으로 전보되었다. 이해 가을에 은대(銀臺)의 당후(堂后)에 천거되었는데 마침 명(明) 나라 조사(詔使)가 사신으로 오게 되었다. 언관(言官)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신을 접대하고 응대하는 즈음에 사무가 심히 많았다. 백씨는 평소에 글씨를 잘 썼는데 붓을 휘두르는 것이 마치 나는 것 같아서 조금도 머물거나 지체함이 없었다. 지신사(知申事) 서애(西厓) 유상공(柳相公) 성룡(成龍)이 동석하였는데 탄복하여 마지않았다. 조사 일행이 돌아가자 병으로 사직했는데 체직되어 대교(待敎)에 제수되었다. 봉교(奉敎)에 올랐다. 계미년(선조 16, 1583년) 봄에 다시 당후(堂后)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출사(出謝)하지 못했는데 도로 봉교에 제수되었다. 가을에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옮겼다가 사간원 정언(正言)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사직하였다. 체직되어 인의(引儀) 겸 한성부 참군(參軍)으로 제수되었는데 가을 겨울 이래로 두 차례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출사하지 못하였다. 갑신년 봄에 또 정언에 제수되었다. 시사(時事)를 논함에 구차하게 합치하려는 것이 없어 자못 쟁신(爭臣)의 풍모가 있었는데, 병으로 사직하였다. 체직되어 공조 좌랑에 제수되었으나 병으로 그만두었다. 다섯 번 정언에 제수되었는데 병으로 사직할 뜻을 올렸으나 미처 해면되기도 전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우리 형제는 어려서부터 서로 의지하는 것을 운명으로 여겼다. 아우가 옆에 없으면 백씨는 하루도 편안하지 못하였다. 근(根)이 바야흐로 옥당(玉堂)의 교리(校理)로 있을 때, 사직서를 올리고 병을 간호하였다. 백씨는 항상 홀로 거처하였는데 하루는 부인을 불러 말하기를, “수명이 짧은 것도 명(命)이니, 내가 비록 갑자기 죽더라도 아우가 있으니, 나는 걱정이 없다.” 하였다. 여러 아들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숙부가 계시니 내가 있는 것과 같다.” 하였다. 근(根)에게 말하기를, “내가 스스로 기력을 헤아려 봄에 아우만큼 약하지는 않아 비록 죽을 마시면서도 지낼 수 있었는데, 지금 와 생각하니 참으로 잘못이었다. 여러 아들 중에 시회(時會)는 이미 아내가 있으나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시행(時行)이 병간호를 가장 오래 하여 기력 또한 많이 허해졌다. 내가 죽은 뒤에 모름지기 나를 거울로 삼아 깊이 경계하여 살아날 길을 가리켜 보여 주도록 해 다오.” 하였다. 죽음을 맞이하여 죽음을 보기를 마치 밤낮이 교대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보았고 조용하여 동요하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부인 이씨(李氏)는 증(贈) 이조 참의 희천(希天)의 따님으로 종실(宗室) 정국공신(靖國功臣) 운수군(雲水君) 효성(孝誠)의 현손녀(玄孫女)이다. 시집와서부터 모친을 받들어 어긴 적이 없었다. 백씨를 섬기기를 손님을 접대하듯 하였고 친척과 비복(婢僕)을 대할 때는 모두 은혜로운 뜻을 담았다. 홀로 되고 나서는 여러 아들을 의(義)로 가르쳤으며, 아들들의 극진한 봉양을 받았다. 또 진안위(晉安尉)의 길례(吉禮)도 보았으며, 거듭해서 정경부인(貞敬夫人)에 봉해져 세상에서 영화롭게 여겼다. 백씨보다 31년을 더 살아 70세 되던 갑인년(광해군 6, 1614년) 9월 29일에 세상을 떴다. 아들 다섯에 딸이 하나인데, 장남 시회(時會)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여러 차례 군(郡)과 부(府)의 재(宰)를 맡았으며 지금은 선산 부사(善山府使)로 있다. 차남 시행(時行)은 홍문관 교리로 이조 참판에 증직되었다. 삼남 시형(時亨)은 고령 현감(高靈縣監)이며 사남 시보(時輔)는 횡성 현감(橫城縣監)이다. 근(根)은 아들을 낳았으나 요절하여 시보를 후사로 삼았다. 시민(時敏)은 장가들기 전에 죽었다. 딸은 정읍 현감(井邑縣監) 김출(金秫)에게 시집갔다. 손자는 여섯인데 석(碩)은 진사로 시회의 아들이다. 적(頔)과 영(穎)은 시행의 아들인데 적이 바로 진안위(晉安尉)이다. 수(須)는 시형의 아들이다. 구(䪷)와 송(頌)은 시보의 아들이다. 손녀는 열 명이고 외손녀는 셋이다. 사인(士人) 민성청(閔聖淸), 진사 오준(吳竣)은 시회의 사위이다. 사인 목성선(睦性善)은 시행의 사위이다. 사인 김정(金鼎)은 시형 전처(前妻)의 사위이다. 사인 경이후(慶貽後), 이기현(李耆賢)은 시형 후처(後妻)의 사위이다. 막내딸은 아직 어리다. 시보는 세 딸을 두었는데 모두 어리다. 사인 홍선(洪銑), 김종필(金宗泌)은 김출의 사위이다. 석(碩)은 1남 1녀를 낳았고 구(䪷)는 아들 둘을 낳았다. 내외 증손이 남녀 열여섯 명인데 모두 어리다. 다음과 같이 명(銘)하노라.
예전에 우리 선군 우리 어머님과 더불어 보물을 품고 덕의 씨앗을 뿌렸지 너무 휘황찬란할까 걱정하여 기다렸다 빛을 발했으니 이분이 바로 우리 형님이셨네 이룬 것이 단단하고 오래 걸렸으니 어찌 빼앗기가 쉬울쏜가 하늘이 인(仁)을 부여하였으나 수명은 겨우 불혹(不惑)에 그쳤도다 인망이 바야흐로 융숭한데 잠시 시간(試諫)을 맡았도다 선(善)은 보답받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이 당연한 이치로다 신이시여 들으소서 한 번 감에 어찌 이리 아득한고 여기에 향사하노니 때대로 음복하소서 뒷사람을 위해 길을 열고 넉넉하게 남겨 준 것이 다함이 없도다 은혜를 미루어 작위를 내리니 저승까지 미칠 지어다 필유여경(必有餘慶)이란 말, 지금에 와서 인색치 않으니 네 아들이 모두 벼슬길에 올랐도다 불초 아우 근(根)은 나라와 휴척(休戚)을 같이하는 신하이고 손자들이 늘어섰으니 역시 차림새 있게 손님을 맞이할 수 있도다 부인은 홀로 된 지 서른 한 해 자식 봉양을 제대로 받았고 백발에 칠십까지 살았으니 잘난 자손들이 앞에 줄지어 섰도다 바라건대 대대로 자손들이 보존하여 이것을 보기에 게으르지 말지니 비석은 묘도(墓道)에 있도다
만력(萬曆) 45년(광해군 9, 1617년) 11월에 세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