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 메뉴

바람따라 구름따라 가는길

소수면 수리 만세운동유적비(沼壽面 壽里 萬歲運動遺蹟碑) 본문

충북의 바람소리/괴산군(槐山郡)

소수면 수리 만세운동유적비(沼壽面 壽里 萬歲運動遺蹟碑)

충북나그네(푸른바다) 2020. 8. 14. 20:00

 

만세운동유적비는 소수면 의용소방서옆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높이1.5m, 너비 2.87m의 아담한 크기의 유적비는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2일 소수면민이 주도한 독립만세운동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소수면민의 만세운동을 후대에 널리 알리기 위하여 1985년 9월에 괴산군에서 건립한 우리고장 현충시설이다.

 

 

3·1운동은 일제에 의하여 침탈되었던 국가의 주권과 민족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거족적인 항일투쟁의 독립운동으로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시작되어 독립만세의 민족적 절규는 전국 방방곡곡에 울려 퍼졌다. 소수면민의 만세시위는 4월 2일 새벽 2시경에 옥현리에서 군중 약 500명이 독립만세를 외치고 면사무소를 습격하려 하였으나 왜경에게 저지를 당하였고, 밤 8시경에는 군중 약 300명이 길선리의 면장집에 쇄도하여 면장을 선두에 세우고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였으며 각 동리를 순회하면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 시위운동을 주도한 유해륜(柳海崙), 경권중(慶權重), 송능식(宋能植) 선생 등은 피검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유해륜 선생은 1990년에 애족장이 경권중 선생은 1977년 대통령표창과 1991년 애족장이 송능식 선생은 1996년에 대통령표창이 추서되었다.
괴산군 소수면 수리 도로변에는 소수만세운동유적비가 자리하고 있다.

 

 

경권중(慶權重) 1871(고종 8)∼1920 은 독립운동가이다. 소수면 몽촌리(夢村里)에서 1871년 11월 28일 출생했다. 호는 난서(蘭瑞)이다.1907년 의병에 가담하여 전남 구례, 곡성 등지에서 일본군에 대항해 싸웠다. 1919년 4월 2일소수면 길선리(吉善里)의 면장 김승환(金昇煥)과 소수면 주재소를 찾아가 독립만세를 부르자고 권유하였다. 또한 면민 200여 명을 설득하여 면장 집과 경찰주재소 앞에서 독립만세를 외치기도 하였다. 새벽 2시경, 옥현리(沃峴里)에서 약 5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였고, 면사무소를 습격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의 제지를 받았다. 그날 밤 8시경 다시 300여 명의 군중과 함께 면장의 집을 습격, 면장을 앞세우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지도자 류해륜(柳海崙), 송능식(宋能植)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1919년 6월 12일 경성 복심법원에서 소요혐의로 징역 10개월 형을 선고 받고 청주형무소에서 복역 중, 고문의 여독으로 병보석 되었으나 1920년 3월 8일 별세하였다.

 

유해윤(柳海崙) 1883(고종 20)∼1956 독립운동가. 소수면 몽촌리(夢村里)에서 1883년 12월 2일 태어났다. 이명은 해윤(海潤)이다. 1919년 독립만세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자, 경권중(慶權重), 송능식(宋能植) 등과 함께 독립만세 시위를 계획하였다. 1919년 4월 2일 새벽 2시 준비한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누어주고 옥현리에서 군중 50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 그날 밤 8시에는 소수면 길선리(吉善里)에 사는 면장 김승환(金昇煥)의 집과 소수면 주재소로 집결하여 면장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였다. 이 시위로 지도자 유해윤, 경권중, 송능식 3명이 검거되었다. 이해 4월 23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0월형을 선고받고 5월 1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 기각되었으며, 6월 16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어 1년여의 옥고를 치렀다. 1963년 11월 26일 별세했다. 정부는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송능식(宋能植) 1898(광무 2)∼1963 독립운동가. 소수면 몽촌리(夢村里)에서 1898년 5월 27일 출생하였다. 1919년 3월 19일부터 4월 2일까지 괴산면, 청암면, 소수면 등지에서 만세시위운동을 주도하였다. 특히 1919년 4월 2일 소수면에서 전개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유해륜(柳海崙)·경권중(慶權重) 등과 함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여 1919년 4월 2일 새벽 2시경, 시위 군중 500여 명을 조직하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옥현리(沃峴里)의 면사무소를 습격하려 하였으나출동한 일제 경찰의 저지로 중지되었다. 같은 날 밤 8시경, 다시 300여 명의 군중을 규합하여 면장 집을 습격하고 면장을 앞세워 독립만세를 외치며 행진하다 해산하였다. 그러나 일제경찰은 주도자들을 체포하였고, 송능식도 이때 체포되었다. 1919년 4월 23일 공주지 방법원 청주지청에서 보안법으로 징역 6월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는 1996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운동사』(국가보훈처)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국가보훈처)